최광섟기자

‘국민 아버지’로 각인되며 일생을 살아온 배우 최불암이 29일 밤 10시께 서울 강서구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별세했다. 향년 87세.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재활에 힘써 오며 최근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로 근황을 전하기도 했던 고인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력을 유지했으나,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1939년 인천 동구 금곡동에서 아버지 최철과 어머니 이명숙 사이에서 외동으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영화 ‘수우(愁 雨)’(1948)를 제작한 부친이 개봉을 앞두고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소년 영한(최불암의 본명)은 자신이 부친의 영정을 들고 인천 동방극장 시사회장에 섰다고 훗날 회고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짧았다. 부친의 부재는 이후 영한의 연기 인생에 뿌리이자 숙명으로 자리한다.
신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던 날 큰아버지가 ‘불암(佛岩)’이라는 이름을 가져왔다. ‘부처님 바위’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었다. 불자였던 어머니는 그 거룩한 이름을 생전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고인은 1959년 극단 ‘실험극회’ 연극 ‘햄릿’으로 데뷔, 67년 세월을 배우로 살았다. 55편의 연극과 130여 편의 드라마, 90여 편의 영화에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어록들은 한 배우의 연기론이자 한 어른의 인생론이었다.
“연기자는 백지 같아야 한다.” 고인이 평생 붙든 연기 지론이다. 좋은 연기를 하려면 캔버스처럼 맑아야 하고, 한 배역이 끝나면 빨리 잊고 타성에 젖은 연기와 관습적인 캐릭터를 깨뜨려야 한다고 설파했다.
1967년 KBS 특채 6기 탤런트로 뽑히면서 드라마에 데뷔했고, 2년 뒤인 1969년 MBC로 소속을 옮기면서 한국형 수사물의 시초격 ‘수사반장’과 국내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를 만났다.
‘수사반장’에서 정의롭고 인간미 넘치는 박영한 반장을 연기했고, ‘전원일기’에서는 양촌리 김회장으로 출연하면서 전통적인 한국 아버지상을 만들어 냈다. 고개를 젖히며 “파하~” 파안대소하는 웃음도 이때 탄생했다.
그는 “닮고 싶은 인물, 따라가고 싶은 인간상을 TV가 그려 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공인으로서의 도리도 한 결이었다. “대중 앞에 얼굴을 내놓고 산 사람이니, 얼굴값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뛰어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국민 아버지’로 일생을 국민과 함께했지만, 만년에 이르러선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가족을 건사하고 동네를 걱정하던 아버지상이 지워졌다며 한동안 드라마를 멀리한 까닭을 밝히기도 했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길어진다.” 1989년 ‘수사반장’ 마지막 회에서 박 반장은 이렇게 말하곤 경찰서를 나섰다. 급속한 산업화가 빈부 격차를 키우고, 그 그늘이 범죄로 번져가던 시대를 향한 일갈이었다.
1990년대엔 유머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는 “각박한 세상에서 곧 멸종될 것 같은 순박한 캐릭터가 어리숙한 시리즈를 낳은 것 같다. 광대의 한 사람으로서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도 전했다.
고인은 잠시 방송계를 떠나 한동안 다른 길을 걷기도 했다. 1992년 통일국민당 비례대표(당시 전국구의원)로 제14대(1992∼1996)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발을 들였다.
연이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영등포구을 지역구에 출마했고, 당시 정치신인이었던 김민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자 곧 ‘전원일기’를 통해 다시 본업인 연기에 복귀했다.
고인이 꼽은 인생작은 ‘수사반장’이었다. 에세이에선 “‘수사반장’의 시그널 음악만 들어도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썼다. ‘수사반장’은 연기를 다진 초석, ‘전원일기’는 한 단계 높이 날게 해 준 빛나는 날개라고 했다.
2024년 드라마 ‘수사반장 1958’이 고인의 마지막 연기가 됐다. 노년의 박영한으로 나와 앞서 세상을 떠난 동료 형사들의 무덤 앞에서 경례했다. 이어 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 제작진에 응답했다.
재활에 전념하길 바란 가족의 요청으로 방송에는 직접 출연하지 않았다. 화면 밖 그가 건넨 인사는 이랬다. “오랜 시간 저를 사랑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게 광대(廣大)의 마음이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인 지난 20일 오후 병실을 방문한 염수정 추기경의 집전으로 병자성사를 받았다. 병자성사는 병마로 고통받거나 생명이 위중한 신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 구원을 비는 가톨릭 의식이다.
고인은 2018년 10월 염 추기경 주례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섬긴 성자의 뜻을 본받고자 본인이 선택한 ‘프란치스코’였다. 평생의 반려 김민자 씨와 혼인 갱신식도 함께 진행했다.
안방극장 밖에서도 선한 영향력을 펼쳤다. 1981년 드라마 ‘전원일기’ 촬영장에서 아역배우들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후원을 시작했으며, 1985년부턴 재단 전국후원회장으로 활동했다.
고인은 생전 상복도 많았다. 백상예술대상 TV 부문과 연극 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을 비롯해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78)·남우주연상(1979), 국민훈장 목련장(1998), 은관문화훈장(2014) 등을 받았다.
또 드라마 ‘수사반장’으로 경찰의 이미지를 제고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명예 경찰에 위촉된 것을 시작으로, 2024년 민간인 중 처음으로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치안정감)으로 추대됐다.
장례는 고인이 헌신했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5일간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배우 김민자 씨와 아들 동녘, 딸 동비 씨가 있다.
발인은 11월 2일 아침, 발인 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성당에서 염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례미사가 열릴 예정이다. 경기도 파주시에 자리한 ‘동화경모공원’에서 마침내 영면에 든다.
부평위클리 THE BUPYEONG WEEK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