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者手帖] 부평 캠프마켓 미군부대 세밀한 연구 조사가 우선.. 그 뒤에 캠프마켓 활용 방안 고민해도 늦지 않아

by 이장열 편집인

최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미군기지 캠프 마켓과 인천육군조병창 유적 보고서’ 2권이 나왔다.

캠프마켓 부지에 서 있는 건물 도면을 미군측으로 인천시가 인수 받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건축 도면 해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공식적으로 캠프마켓에 첫 조사 보고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캠프마켓을 둘러싼 활용방안을 두고, 부평 미군부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미군부대 건물을 싹 없애고 호수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청원을 인천시에 5번째 내놓고 있다.

또 다른 의견은 일제강점기 조병창 시설이었던 캠프마켓 내 건물들은 일본 제국주의 한반도 침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 유적이기에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병창과 해방 이후 부평 애스컴시티 미군기지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도울 연구와 조사들이 미미한 수준에 놓여 있는데, 활용 방안에만 조급하게 매달려 있는 분위기다.

인천 지역 학계와 오피니어들 거 누구도 제대로 남아 있는 캠프마켓 미군부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자고 소리 높혀 말하지 않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번 보고서는 캠프마켓 미군부대에는 한국근현대사가 관통하고 있고, 인천 부평 지역사에도 너무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이여서, 향후 활용방안에만 매몰되어 있는 지역 여론에 앞서 조사와 연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번 보고서에는 캠프마켓 주요 연표가 수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조병창 시절과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 일어난 일들을 지금까지 나온 것들을 시기별로 정리하고, 새롭게 자료를 발굴해서 수록된 것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캠프마켓을 둘러싼 중요 연표를 까려 뽑아서 아래에 둔다. 캠프마켓 미군부대가 인천 부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1945]

9월 16일

인천육군조병창에 설치된 기지를 애스컴 시티(ASCOM City)로 명명.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Peace and War』,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62, p.43) 1946 04. 27 미 제382 위수병원(382d Station Hospital), 일본 오키나와와 부산을 거쳐 애스컴시티로 이동. 400병상을 갖춤. 이 에 따라 미 제227 위수병원(227th Station Hospital)이 애 스컴시티에서 이동함. 이 병원은 1949년까지 위치함. 이 후 이곳에 미 제55 병참창 장교클럽(55th Quartermaster Depot Officers Club)과 장교숙소(Bachelor Officer quarters)가 들어섬. (Department of Defense, 1956-1957, Ascom City, Korea, 소 장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 료관 사료참조코드 AUS251_09_00C1456, 원문 P.4)

[1947]

1월 3일

미군이 사용중이던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해 미군 6명이 사망함. (‘부평 조병창서 미군 6명 소사(燒死)’, 『대중일보』, 1947. 1. 4)

3월 22일

부평 조병창 공장 철도 관계 기관에서 파업. 이날 전국 각 지에서 운수교통기관 노동자들의 파업과 학생들의 맹휴 사 건이 발생함.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생활확보’, ‘전평(全評) 관계자 즉시 석방’ 등을 요구하고, 학생들은 ‘국대안(國大 案) 반대’, ‘민주학원 건설’, ‘학원의 경찰 간섭 반대’ 등을 내 걸고 맹휴에 돌입함. (‘운수출로기관(運輸出勞機關)등서 파업’, 『경향신문』, 1947. 3. 23 / ‘서울.대구 등지 작효(昨曉) 부분적으로 파업’, 『조선일보』, 1947. 3. 23 / ‘경무부에 들어온 보고’, 『중외경제신문』, 1947. 3. 24)

 

[1949]

캠프 애스컴 베이커리(CAMP ASCOM Bakery) 운영. (RG 554: AG 600.12 Project Estimate (Pointing of Ascom Bakery) 1949 /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49 –

5월 1일

1월 5일부터 2주일간 남한 각 종합병원 원장들이 부평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군의훈련을 받음. (‘종합병원장들 군의훈련 시작’, 『동아일보』, 1949. 12. 27

6월

미 제382 위수병원(382nd Station Hospital)이 해산된 뒤, 같은 건물에 대한민국 육군제1병원이 들어와 한국전쟁 이 전까지 위치함. 육군제1병원은 이 해 5월 1일에 창설됨. (Department of Defense, 1956-1957, Ascom City, Korea, 소 장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 료관 사료참조코드 AUS251_09_00C1456, 원문 P.9) 06. 29 미군 철수 완료. 500여 명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KMAG: The U.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만 잔류. 애스컴에는 군인 가족 등을 포함해 모두 60여 명이 잔류함. (김일영·조성렬, 『주한미군』(역사, 쟁점, 전망), 한울, 2003, 47∼ 50쪽 /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Peace and War』,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62, p.51

6월 29일

미군 철수 완료. 500여 명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KMAG: The U.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만 잔류. 애스컴에는 군인 가족 등을 포함해 모두 60여 명이 잔류함. (김일영·조성렬, 『주한미군』(역사, 쟁점, 전망), 한울, 2003, 47∼ 50쪽 /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Peace and War』,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62, p.51

 

[1950]

6월 26일

애스컴에 집결했던 미군과 가족들이 공군의 보호를 받으며 매뉴얼에 따라 인천항을 출항. 새벽 1시 경 미국인 부인과 어린이 700여 명을 태운 첫 버스가 서울을 출발, 부평에 집 결했다가 인천항에서 노르웨이 선박을 이 용해 일본으로 철수함.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애스컴시티가 다시 수복되 는 1950년 9월 중순까지 북한군의 수중에 놓임. (Department of Defense, 1956-1957, Ascom City, Korea, 소 장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 료관 사료참조코드 AUS251_09_00C1456, 원문 P.9 /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Peace and War』,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62, pp.110∼ 112, 123 / ‘25년만에 공개된 최고기밀문서 -블레어하우스 긴급 회의’, 『동아일보』, 1975. 6. 24)

9월 17일

부평전투 발생. 이 날 새벽,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 D중대 가 원통이 고개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임. 전투 이후 미 제 5연대 2대대 E중대가 애스컴시티에서 시가전을 전개함. 3 대대 G중대는 애스컴시티 주 변 기관총 기지를 파괴함. (‘Transcript of an Oral History Interview with LEROY E. SCHUFF’, Wisconsin Veterans Museum, 2005 / ‘2d Battalion, 5th Marines land at INCHON’, 2d Battalion, 5th Marines, 1993)

9월 18일

미 제3군수사령부(3d logistical command), 인천에 상륙 해 애스컴시티에 주둔. 제3군수사령부는 미 제10군단(X Corps)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됐으나 1950년 10월, 미 제 10군단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한 후에는 부평에 남아 미 제8군에 대한 지원 책임을 맡음. (Terrence J. Gough, 『U.S. Army Mobilization and Logistics in the Korean War : A research Approach』, U.S. Army, 1987, pp.7∼8, 11,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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