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의 제2기, 한미동행 상징 삼아야-(인천일보, 2022. 11. 28일자)

by 이장열 애스컴시티뮤직아트페어 대표. 문화기획가

최근 유정복 인천시장은 유럽 출장 기간에 노르망디상륙작전 기념관을 방문한 뒤 대한민국을 공산적하로부터 구한 인천상륙작전도 노르망디상륙작전에 비견됨을 깨닫고 자유를 지켜낸 세계사적 가치를 지닌 국제적 행사로 치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인천상륙작전이 지닌 자유 수호 의미가 매우 지대함에도 대한민국은 그 동안 애써 이런 가치를 외면하거나, 이른바 미국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눈치를 봐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50년 9월15일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공산치하로부터 지켜낸 가치보다는, 월미도에 미군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사망하게 이른 안타까운 일에 묻혀서 그 동안 조용히 기념행사를 개최한 것이 사실이다. 인천시장이 교체되면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민간 차원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힘겹게 이어오기도 했다.

월미도 주민들이 미군 폭격으로 억울하게 사망한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좀 더 정교한 작전이 펼쳐졌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민간인들의 죽음도 국가 차원에서 배상이나 보상이 꼭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좀 더 검토할 사항이 있다.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제 1목표가 어디였을까 하는 부분이다. 윌미도도 아니다. 서울도 아니다.

제 1작전 목표는 부평에 있던 군사기지를 인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함과 동시에 부평으로 와 미군이 주둔했던 군사기지를 점령했다. 부평 군사기지는 비행장도 있고, 군수물자를 보급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인민군 주력부대는 부평을 서울과 함께 가장 먼저 점령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월미도를 통해 들어온 미군(유엔군)은 곧장 부평 쪽으로 탱크와 전투부대를 앞세워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부평 군사기지를 탈환하는 작전에 집중했다.

지금의 부평아트센터 쪽과 부평삼거리 쪽, 2개 방향으로 미군 주력부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인민군들이 필사적으로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저항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제 1목표로 삼은 부평 군사기지 탈환에 화력과 병력을 집중한 미군에 의해 격퇴 당하고, 부평 군사기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김포 비행장도 함께 탈환한다. 부평 군사기지에 교두보를 확보한 미군은 김포 근처 한강 도하작전을 펼쳐 마침내 서울을 수복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인천상륙작전의 제 1목표는 부평 군사기지 탈환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오랜 시간 다가서지 못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평 군사기지는 미군이 6·25전쟁이 나기 전 주둔한 군사 요충지였고, 대한민국과 미국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교두보였던 역사적 의미를 애써 지우고 싶은 세력들이 있었기에 그렇다고 여겨진다.

인천상륙작전은 한미동맹을 이어지게 만든 상징적 사건이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이 나기 전 미군이 주둔한 부평 군사기지를 인민군으로부터 탈환하면서 한미동맹이 복원되었고,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간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킨 대작전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2023년 국제적 행사로 열리게 되는 인천상륙작전은 한미동맹의 상징으로서 의미가 담겨 있음을 분명히 선언해야 한다. 기념식에 이어지는 퍼레이드 역시 월미도에서 시작해 인천상륙작전 제 1목표였던 부평 캠프마켓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미래 세대에 정확히 알려내야 제 2기 한미동맹을 이끌 선도 도시로서 인천의 위상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멋진 풍경이 지금부터 기대된다.

출처 : 인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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