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의 인천 근대 골목 풍경-2> 해방, 그날 화수동 두 풍경

글쓴이: 이성진_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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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화수동(신화수리)는 없는 동네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로 비위생적이어서 전염병도 많이 발생하고 우범자도 많은 시끄러운 동네였다. 특히 건달패들이 많이 있어 툭하면 전동, 인현동, 신흥동으로 건너와 괜히 일본인들을 폭행하고는 화수동으로 건너와 숨어 버리면 찾을 수도 없는 그런 동네였다.

일본경찰에게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청년들이 많이 있고, 적색노조가 침투하여 트로이카 조직을 형성하는 반일 기질이 많은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골치 아픈 동네였다.

더욱이 강제징용이 되면서 일본경찰을 앞세우고 남녀청년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싫은 청년들 중 잠적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여러 날을 드나들며 부모를 못살게 했다. 어느 날 그 집에 일장기가 걸리고 어깨에 전대를 두른 청년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그 뒤를 동네사람들이 따라 갔다. 일본군가를 부르기도 하고 일본 천왕 만세를 힘차게 외치기도 하였다.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건달패가 되어 일본 사람을 의도적으로 폭행하여 잡범이 되기도 하고, 일부 청년들은 미친 척이나 모자라는 행동을 하여 강제징병이나 징용을 피하기도 하였다.

일본인에게는 화수동은 무관심지역이었고, 그에 따라 소외지역이었다. 심지어 수인성 전염병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전염병이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출입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해방은 어느 다른 지역과 다르게 다가왔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는 것조차도 일본 경찰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수동 일대는 일본 경찰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은 지역인 까닭에 일본 천왕의 항복선언 소식을 듣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집단시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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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제국주의의 멸망은 예견되지만 그렇게 쉽게 빨리 올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해방은 우리에게 이렇게 왔다.

1945년 8월 15일, 화수동 쌍우물에서 산동네로 올라가는 길목 담배가게에서는 예전과 같이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넓은 마당길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마침 방학 중인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놀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담배가게 주인아저씨는 라디오를 크게 켜 놓고 힘없는 일본인의 목소리를 듣더니 갑자기 일본이 항복했다며 길로 뛰어 나오며
“조선독립만세”
를 외쳤다.

담배가게 앞에서 놀던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 줄 모르고 담배가게 아저씨가 미친 줄 알았다.

“일본이 항복했다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야, 조선독립만세가 뭔 소리야?”

도저히 믿기지 않은 소리를 외치고 있는 담배가게 아저씨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는 일본 천왕의 항복문 낭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수동 쌍우물 창고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창고집은 우리 가족이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앞방에 사는 우리들의 왕초 무술사범님이 살고 있었던 까닭에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러 갔는데 이미 알고 있었다. 집으로 찾아온 아이들을 데리고 쌍우물가로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몇 아이가 만세를 부르자, 동네 어른들도 몰려 나와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평소 침을 흘리고 다닌다고 좀 모자라는 사람 취급을 당했던 무술사범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조선이 일본놈으로부터 독립되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전달하였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워낙 가난한 조선사람들만 살고 있어 일본인들이 전혀 살지 않았지만 조금만 달려가면 화수부두 가는 길에 조선기계작소라는 공장이 있어 공장 옆으로 일본인 노동자가 살고 있는 사택동네가 있었다. 그 동네로 모두들 달려가 행길 건너편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출처: http://blog.donga.com/sunlim1102/archives/6741)

2.
“그때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은 집에서 들었지. 일을 끝내고 집에서이니까 저녁 7시지. 그 시절에는 대부분 라디오가 없었지만 우리 집은 있었어. 에 조그만 라디오가 하나 있었거든. 내가 영화도 좋아했고,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했어. 그래서 하나 구입했어. 일본 사람들은 흔했지만 조선사람한테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어. 집에 오니까 아내가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고 저녁을 먹으면서 그래 뭔일인지 라디오를 켰지. 일왕이 울면서 방송을 하더라고. 뭐라고 했는지 잘 모르지만 자기네들이 졌다고 그런 얘기지. 그리고 미주리함대에서 일본 도조 히데끼 수상 놈하고 맥아더 장군하고 항복 조인식을 했지.”

“그때 우리 집은 여기서 조금만 가면 있지. 그 화수동 동사무소 옆에 살았는데 거기서 일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떠들고 야단들이었어. 화수동 일대는 난리가 났지. 온통 해방이 되었다고 떠들고 다녔어. 하도 시끄럽고 해서 저녁 먹고 극장이나 가려고 시내로 나가니까 다른 때보단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더군. 그렇다고 해방 되었다고 만세를 부르거나 태극기는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어.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어”. 박상규(1922.06.30.생.)  2006.08.16. 오후 5시 만석동 신일철공소에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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