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김대중. 신문기자 50년… 歷代대통령들이 ‘치워버리고’ 싶어 한 直筆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 조선일보가 특집으로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다.
김대중을 좋아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김대중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김대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김대중을 알아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김대중은 우리 나이 76세. 그런데도 사무실과 급여를 제공받으며 
글을 쓰고 있는 사실이, 그 힘이고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 미워하지만 극복이 되지
않는 원초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이른바 자칫 진보진영에서도 매체의 힘을 키워, 이른바 김대중을 능가하는 언론인을
키우고 보위하는 기초적인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76세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를 보면서, 
조선일보와 김대중을 배워야 그를 뚸어넘을 수 있는 
이른바 역사의 진보와 합리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그런 필봉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언론 외길 김대중
“아부 안 해도 되고,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신문기자로 산 게 좋았다”
난 財福 없는 ‘신문사 안 개구리’… 나랑 반대로 하면 돈 번다고들 하더라
좋은 글, 좋은 칼럼이란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몰랐던 걸 알게 해줘야
짜깁기 않고 단번에 써야 독자들도 한 호흡에 읽어
‘쟁이’ 본분을 지켰다
권력 압박·유혹 있었지만 다른 직업 생각하지 않아
매일매일 정면 승부 하는 사회부장 때가 재밌었다
‘배짱’대로 쓴 게 통했다
논객은 소통하는 직업 아냐 자기의 생각을 얘기할 뿐
的確한 단어를 찾아내면 비로소 글이 풀리더라
잘 삐지는 싸움닭
예의 안 차리면 싫어해 나는 好不好가 강하다…
류근일이 내게 그러더라 당신같은 사람 받아줄 덴 신문사밖에 없을 거라고

김대중(76) 조선일보 고문은 6월 1일로 기자 생활 50년을 맞는다. ‘신문기자 50년’이란 한국 언론계에서 드문 기록이다. 기자 본인의 능력과 의지도 중요하고 신문사 여건도 받쳐줘야 한다. 김 고문은 1965년부터 25년은 현장에서, 1990년 주필이 된 이후엔 칼럼과 사설로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지켜봤다. 한국 언론계에서 50년 기자 기록도 찾기 어렵지만, 반세기 동안 오로지 한 신문에서,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칼럼으로 권력자들을 긴장하게 한 기록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김대중(76) 조선일보 고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손으로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김 고문은 신문기자로 산 50년 세월을 되돌아보다가 “나는 노병(老兵)이다. ‘쟁이’로서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김대중(76) 조선일보 고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손으로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김 고문은 신문기자로 산 50년 세월을 되돌아보다가 “나는 노병(老兵)이다. ‘쟁이’로서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76세 현역인 김 고문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으로, 또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힘은 논리와 비판을 장착한 글의 힘에서 나왔다. 그는 마흔 살 때부터 지금까지 칼럼니스트로서 거의 모든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 때로는 어딘가 딴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기자였다. 그래서 망명 가듯 외국에 나가 있기도 하고, 세무조사와 계좌 추적을 받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당초 신문 게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50년 기자’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차원에서 추진됐다. 김 고문도 “인간 김대중보다는 언론인 김대중을 조명해달라”고 했다. 지난 18일과 22일 그는 2회에 걸쳐 역대 대통령들과의 관계, 글 쓰는 고민을 풀어놨다. 6시간 녹음을 풀어보니 흥미로웠다. 김 고문은 반대했으나, 그의 의사에 반해 이 기사를 싣기로 했다.

―기자로 일한 지 50년 됐다. 26세에 기자가 돼 76세에도 현역이다. 비결이 뭔가.

“기자를 50년 동안 해보겠다고 목표를 세워 추구한 게 아니라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그저 노병(老兵)일 뿐이다. 그리고 ‘쟁이’로서의 본분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쟁이’로서의 본분이라니.

“우리는 우리를 하루살이에 비유하며 어제의 신문을 구문(舊聞)이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어제가 없다. 어제에 매달리면 회한만 쌓인다. 우리는 내일도 개의치 않는다. 내일에 집착하면 자칫 몽상가가 된다. 우리는 오늘을 살되 치열하게 살면서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없는 것’을 가차없이 들춰낸다. 생명력은 짧아도 생동감 넘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게 내가 신문기자로 살아온 방식이다.”

―50년을 돌이켜보면 기자가 천직(天職)이었나.

“하늘 천(天)자 들어가는 말은 겁난다. 하지만 기자 하면서 한 번도 다른 직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맞다.”

―칼럼니스트로서 평생 흥행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

“내 배짱대로 쓰는 거다.”

―칼럼니스트로서도 기자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취재를 하나.

“나는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캐치하러 다닌다. 사람들 만나 술 마시다가 좋은 쓸 거리가 떠오르면 얼른 밖에 나가 메모한다. 칼럼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든가, 아니면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는 것,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둘 다 하면 더 좋고.”

대통령 비판에 모든 정열을 바친다?


―김대중 칼럼은 대부분 대통령을 겨냥한다. 칼럼니스트 김대중은 좌든 우든 상관하지 않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는 것 같다.

“맞는 얘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과의 대칭관계에서 사물을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사건건 정부가 하는 일에 찬성하려면 뭐하러 언론을 하나. 싸울 때는 누구랑 싸우는 게 제일 좋은가. 상대방의 보스와 싸워 넘어뜨리면 나머지와 안 싸워도 된다. 우리는 보스와 싸우는 게 본업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게임을 좋아하지 않나.”

―시사저널 조사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영향력 있는 언론인 1위(1995년 제외)였다. 그 이후에도 5위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

“‘라이팅 저널리즘(writing journalism)’ 면에서 우리나라는 인적 고갈 상태다. 앞으로도 글 쓰는 기자가 영향력 1위에 오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동영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번 방송에 뺏긴 자리를 라이팅 저널리즘이 되찾아오기는 어려울 테니까. 내가 신문이 우세한 시기에 글을 썼다는 게 행운이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칼럼니스트라 불리는데, 요즘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펜으로 글을 쓰나.

“컴퓨터로 몇 번 써봤는데 글을 고칠 때 고치는 맛이 없더라. 줄 쫙 긋고 싹 집어넣는 그 맛이 안 난다. 종이에 쓰면 지워도 원래 쓴 글자가 남아 있으니까 ‘이 표현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사장이 대통령과 만날 약속이 있는 날 아침 신문에 대통령 비판하는 칼럼이나 사설을 내보내서 사장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던데.

“아니다. 그건 그분들의 면피용이다. 사장에게 그런 일정이 있는지 몰랐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나는 거꾸로 사장에게 ‘일정을 미리 알려 주셔야죠’라고 했다. 비밀로 해놓으니 그걸 어떻게 알겠나. 내가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다. 또 솔직히 비판적인 글을 배경으로 하고 만나야 힘이 생기는 것 아닌가.”(하지만 당시 동료들의 증언은 다르다.)

칼럼 쓰기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김대중 칼럼은 다른 사람 말이나 책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200자 원고지로 겨우 12장 쓰는데, 그중 인용에 두세 장을 쓰는 건 아깝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론에 관한 어록은 ‘언론은 역사의 초고(Journalism is the first draft of history)’라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써왔다.”

 김대중 고문은 요즘도 펜과 원고지를 쓴다. 그는 “컴퓨터로 쓰면 글을 고치는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원고지 12매 분량 칼럼을 쓰는 데 1시간 반쯤 걸린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중간에 쉬지 않고 써서 완성하는 것이 독자들이 읽을 때 흐름이 끊기지 않는 글을 쓰는 비결이다.

 김대중 고문은 요즘도 펜과 원고지를 쓴다. 그는 “컴퓨터로 쓰면 글을 고치는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원고지 12매 분량 칼럼을 쓰는 데 1시간 반쯤 걸린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중간에 쉬지 않고 써서 완성하는 것이 독자들이 읽을 때 흐름이 끊기지 않는 글을 쓰는 비결이다. /이태경 기자

―칼럼 쓸 때 지키는 글 쓰기의 원칙이 있나.

“글 쓰기 시작해서 끝까지 단번에 쓰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읽는 사람도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한 문단 들어내고 다른 것을 넣을 수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그렇게 안 한다. 글을 짜깁기하면 읽는 사람도 턱턱 걸린다. 내가 글 쓰다가 중간에 화장실 갔다 오면 독자들도 읽다가 중간에 서게 된다. 미리 구성하고 준비해서 책상에 앉으면 되도록 쉼 없이 쓴다.”

―기자가 아니라면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요즘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김훈 작품을 몇 읽었다. 이문열씨 것도 좋다. 어휘를 찾아내고 연구하는 노력을 하더라. 글을 쓴다는 건 문장력과 어휘의 문제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문장력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그 상황에 딱 맞는 어휘, 한 단어를 찾는 것이다. 나는 어떤 단어를, 어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문장이 맛깔지다, 멋있다는 건 신문기자에겐 복이다. 문장력은 타고나야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어휘를 찾아내는 건 책을 많이 읽고 남의 글을 많이 보면 발전시킬 수 있다. 단어 하나를 찾아내서 ‘아, 이거다’ 싶으면서 글이 풀린다.”

―조선닷컴에 실리는 칼럼 중 유독 김대중 칼럼에만 댓글을 달 수 없다. 왜 그런가.

“내 글을 논리적으로 비평하고 자기 얘기의 줄거리를 세워서 비판하는 건 좋다. 내가 충격받은 건 ‘왜 그 따위로 글을 쓰느냐’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돈 얼마 받아먹었냐’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거다. 그런 댓글이라면 차라리 댓글 못 쓰게 한다고 욕먹는 게 내 정신건강을 위해 좋다.”

50년 동안 사표 세 번 썼다


―법대에 갔는데 왜 기자가 됐나.

“아버지가 송사에 휘말려서 법대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대학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시의 압박에서 해방됐다. 나는 기자보다는 글 쓰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게 직업적으로 가능한 게 신문기자라고 생각했다.”

―사표를 내본 적은 없나.

“세 번 내봤는데 기자가 하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첫 번째는 1970년인가?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를 청와대가 거부한다고 해서 젊은 정치부 기자들이 사표를 냈다. 두 번째는 전두환 시절 언론 통폐합 때 기자들 전원 다 사표 내라고 해서 냈다(당시 약 1500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됐다). 세 번째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방상훈 사장이 감옥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김정일 답방을 지지해달라는 DJ의 요청을 거부하자 압박이 왔고 그게 세무조사로 이어졌다. 검찰이 나보고 출두하라고 했다. 죄목이 뭔지 아나. 필화 사건이 아니라 비자금 조성 혐의라고 했다. 순전히 개인 형편 때문에 회사 돈을 가불해서 쓴 것을 마치 무슨 불법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검찰이 몰아가려 한 것이다. 나는 나를 구인하더라도 내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낸 뒤에 민간인 김대중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주필로서 검찰에 가는 게 권력의 언론 탄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더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당시 기자들 생각도 그랬다. 만일 내 글이 문제가 된 거라면 사표를 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정비리에 관여된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갔고 그래서 정말 창피해진 거다. 그때 나는 사표를 내고 ‘조선일보를 떠나며’란 칼럼을 써놓고서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표가 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칼럼이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다.”

YS, 아들 청와대 데리고 가면 안 된다는 칼럼 썼더니…


―김영삼 대통령과도 칼럼 때문에 불화가 있지 않았나.

“YS가 취임하기 직전이었다. 시내 호텔에서 방우영 회장을 초청했는데 내가 수행했다. YS가 아들 김현철을 청와대에 데리고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저녁 먹고 와서 취재를 해보니 김현철이 여의도에 사무실을 냈는데 거기에 이미 사람들이 몰려들어 미어터진다고 했다. 김현철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김현철을 멀리 있게 해야 한다는 칼럼(1993년 2월 21일자 ‘대통령의 친인척’)을 썼다.”

―칼럼이 나간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나.

“초저녁에 나오는 가판 신문에서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나갈 칼럼을 미리 보고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다. 나는 술 먹는다며 도망가 버렸다. 신문사 입사 동기인 최청림이 야간국장인 날이었다. 그날 밤 YS는 아들을 청와대에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내가 쓴 팩트를 틀린 걸로 만들어버린 거다. 청와대에선 그 칼럼 내용이 사실과 다르니 빼라고 했다. 그래서 중요한 대목을 들어냈다. 최청림이 악역을 맡았다. 그때 버텨줬어야 하는데!”

 김대중 고문이 18일 조선일보 사옥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칼럼니스트 평생 흥행’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내 배짱대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고문이 18일 조선일보 사옥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칼럼니스트 평생 흥행’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내 배짱대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그 일 때문에 YS와 사이가 나빠진 건가.

“그다음부터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사이가 나빠졌다. 그 전까지는 YS가 군부에서 민간정부로 넘어오는 바통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YS는 언론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언론인들의 뒷조사를 한 것이 뒤에 드러났다. 그는 스스로 조사해보니 누구는 집이 몇 채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퇴임 후 김대중 대통령이 조선일보를 세무조사할 때 YS를 만났는데 DJ를 비판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현직에 계실 때도 뒷조사를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더니 YS가 ‘나는 발표는 안 했잖아’라고 하더라. YS는 자기만 알고 있고 뒤로 압력을 넣었지만 DJ는 정식으로 문제 삼고 국세청 조사하고 검찰이 수사하게 만들어서 방상훈 사장을 감옥에 가게 했다. 알고 보면 권력자들은 다 똑같다.”

입각 제의 받기도


―대통령들로부터 입각 제의를 받은 일도 있지 않나.

“한번은 DJ가 후보 때 만나고 나오는데 박지원씨가 ‘뭐라고 말씀 안 하시던가요’라고 물었다.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고 하자 무슨 제의를 하려고 했는데 생각을 바꾼 것 같다고 그러더라. YS는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같이 밥 먹을 때 ‘들어와서 도와달라’고 한 일이 있다.”

―어떻게 했나.

“내가 그때 믿었던 건 권력자들이 글 쓰는 기자를 데려가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들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못 쓰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 기자가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그의 머리와 지혜를 활용하겠다는 게 아니다. 언론인의 능력을 탐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 경우는 다를 수도 있지만.”

―전두환 대통령에게도 ‘찍히지’ 않았나.

“전두환은 우리 경영진에게 신문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만 봐도 기분 나쁘다고 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차라리 솔직했다. ‘저 이름 꼴 보기 싫으니까 치우라’는 식이었다.”

―1986년 영국 옥스퍼드대에 간 건 일종의 망명이었나.

“전두환 쪽에서 ‘김대중을 좀 딴 데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논설위원 겸 현대사연구소장’으로 발령이 나고 글을 못 쓰게 됐다. 그런데 신문엔 ‘현대사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이라고 났다. 청와대에 대해 ‘논설위원은 그냥 붙여준 거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거다. 글을 못 쓰게 됐으니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영국에 갔다.”

―권력자들이 미워하고 다른 데 보내라고 하면 기분이 어떤가.

“일상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나는 대통령이나 정부가 잘한다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공직을 맡은 사람이 잘하는 것은 기본이다. 못하면 욕먹을 일이다. 우리는 그런 걸 지적하는 거다. 그렇지만 자기 거 비판하는데 기분 좋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김대중과 햇볕정책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정적으로 사이 나빠진 계기는?

“대북문제, 햇볕정책 때문이었다.”

―그것도 계기가 된 칼럼이 있었나?

“DJ의 햇볕정책은 전반적으로 돈 퍼주기였고 우리는 받는 게 없었다. 나는 그 논리에 찬성할 수 없었다. DJ와 사이가 더 나빠진 건 김정일 답방과 관련된 것이다. 청와대에 불려가서 단둘이 밥을 먹었는데, DJ가 조선일보가 김정일의 답방을 찬성하는 글을 써달라고 했다.”

―대통령이 직접 부탁하는 걸 거절하긴 어려웠을 텐데.

“‘대한민국은 언론 자유가 있는 나라다. 어떤 신문은 찬성하고 어떤 신문은 반대하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대통령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해 끌고 나가면 되지 왜 언론을 다 한줄로 세우려고 하느냐’고 했다. 김 대통령은 ‘대한민국 보수지 조선일보가 찬성을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찬성해야 대한민국 전체가 찬성한다는 뜻으로 여겼다.”

―그래서 김정일 답방을 지지하는 글을 썼나.

“그 자리에서 나는 ‘국내의 여러 이론과 반대에 불구하고 김정일 답방이 성사된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한참 싸웠다. 대통령과 싸우니 사실 좀 거북했다. 나온 후 부탁받은 글은 안썼다. 다만 김정일이 오더라도 어째서 6·25를 일으키고 1·21 사태는 왜 일어났고, 왜 칼(KAL)기를 폭파했는지 먼저 밝혀야 한다고 썼다. 청와대에선 그건 김정일이 오지 말란 얘기 아니냐고 했다. 그걸 보고 DJ가 화가 난 모양이다.”

 김대중 고문이 조선일보 주필 시절 논설위원실 ‘원탁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류근일 논설주간, 김대중 당시 주필, 고학용·김형기·김기천 논설위원.

 김대중 고문이 조선일보 주필 시절 논설위원실 ‘원탁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류근일 논설주간, 김대중 당시 주필, 고학용·김형기·김기천 논설위원. /조선일보DB

―DJ는 어떤 대통령이었나.

“오래 전 내가 초년병 시절에 만났을 때부터 그의 꿈은 남북이 대화하거나 통일할 때 자신이 남쪽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통일을 이룩한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다. 그게 그가 대통령이 되려는 목표였다.”

―이름도 같고, 원래 사이도 나쁜 편은 아니었지 않나.

“그렇다. YS가 대통령이 되자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갔다. YS 정부가 덜커덩거리기 시작하니까 DJ는 돌아와서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사설에 ‘정계 은퇴한다고 나가더니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들어와서 정계 복귀하느냐. 이런 식으로 정치인들의 선언이나 결단은 다 휴지조각이냐’고 썼다. DJ가 만나자고 하더라. DJ는 ‘김 주필이 그렇게 순진한 줄 몰랐다’고 했다. 자신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 YS가 선거자금을 캐는 등 못 견디게 만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는 거다. 때론 이긴 자가 진 자에게 복수하는 게 우리나라다. YS가 뒤에 한 얘기가 있다. ‘DJ가 나간다는데 뭘 뒤지겠어’라고 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왜 사이가 나빠졌나.

“노 대통령과는 만난 적이 없다. 일면식도 없다. 조선일보 사람을 아예 만나지 말라고 엄명했는데 나를 만났겠나.”

보수를 대변한다는 말이 싫다


―칼럼니스트 김대중은 보수의 대변인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사고방식이 보수적이고 이 시대에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당분간은 우파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가 보수를 대변한다는 말은 싫다. 나는 우리나라가 좀 발전하면 양 날개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기업의 활동을 전제로 한 보수 우익 정권은 국고에 돈을 저장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쪼들리게 되고 빈부 격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면 진보 좌파 정당이 들어와 곳간의 쌀을 풀어야 한다. 이번엔 곳간이 빈다. 그럼 또 보수를 불러다가 곳간에 쌀을 쌓기 시작하는 거다. 한 정권이 둘 다는 못한다. 이게 내가 좌우가 순환한다고 보는 논리이다. 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이 이 터널을 빠져나가려면 어느 시점 우파적 관점으로 나라를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나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건방지지 않은, 싸가지 없지 않은, 중후한, 심도 있는 좌파와 공존해야 한다. 보수 우파도 반드시 그래야 하지만, 그래야 그들과 같이 교대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박정희 시대에 기자를 시작했지만 만난 적은 없다. 나는 그때 사회·외신부 기자였다. 정치부에 가서도 야당 편이었다. 야당을 짓밟은 공화당 사람들과 그 우두머리들을 미워했다. 지금에 와선 한 나라를 이끌면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길을 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이해는 한다.”

―전두환 대통령과는 만난 적 있나.

“태풍 때 고생한 신문기자와 소방관들 40~50명 초대하는 데 가서 밥 먹으며 멀리서 한번 만났다. 전두환은 자기가 부족하다고 믿었던지 머리 좋은 사람을 썼다.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 때 죽은 사람들이 다 미국에서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솔직한 사람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노태우를 과소평가하지만, 북방정책을 성공시키고 중국·러시아와 국교정상화를 했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평을 넓힌 사람이다. 그리고 군부통치를 민간에게 넘기는 과도 역할을 자임했다. 그것만은 평가해야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땠나.

“처음엔 좋아했는데 나중엔 실망스러운 대통령이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자신은 공부에 정진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감(感)으로 정치를 한 사람이다. 그래도 금융실명제 했고 하나회 척결도 했다. 잘한 것인지는 몰라도.”

“맞다. 나 잘 삐진다”



 Who is… 김대중
―김대중 칼럼은 박력있다는 평을 듣는다. 글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돌격해가는 스타일이라 파괴력이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인간 김대중은 섬세한 성격이고 잘 삐진다고 하더라.

“박력있게 삐지는 것인가. 나는 호불호가 강하다. 누군가 나에 대해 험악한 얘길 했다면 만났을 때 외면하는 스타일이다. 예의를 안 차리고 말을 함부로 하고 어디 가서 확인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

―오랜 시간 논설위원실에서 함께 일했던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곁에서 본 김대중이 ‘몽니로 뭉친 사람’이고, 청개구리 심보를 타고 났으며, 심통 그 자체라고 했다. 자기 이외의 다른 스타를 견디지 못하는 ‘샘쟁이’이고, 자기 혼자 글만 쓰면 되는 논설위원실이란 직종이 없었으면 큰 일 날 뻔한 사람이라고 했다. 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싸움닭’이라고 하더라.

“싸움돼지라고 하는 것보단 싸움닭이 낫지. 하하… 류근일은 늘 내게 ‘세상에 너 같은 사람 받아줄 데는 신문사밖에 없고 신문사 중에서도 조선일보밖에 없다’고 했다.”

“돈 벌려거든 김 주필 반대로만 해라”


―당대 언론계에서 영향력 있는 기자로 꼽히지만, 재복은 없다는데.

“내가 신문기자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세 가지다. 첫째 신문사는 빽이니 뇌물이니 이런 거 없이 성실하게 실력껏 노력하면 되는 직장이라는 거다. 둘째는 신문사에선 아부 안 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다. 셋째는 돈과 연관되지 않고 비교적 깨끗하게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셈에 밝다던데 아닌가 보다.

“한때 연말 상여금을 계열사 주식으로 받았다가 거의 다 날려먹었지. 방상훈 사장이 한 유명한 얘기가 있다. 돈을 벌려면 김대중이 하는 정반대로 하면 된다고.”

―한 끼도 그냥 먹지 않고 늘 맛있는 걸 찾아다닐 정도로 먹는 걸 좋아한다는데.

“마시는 걸 더 좋아하는데(웃음)? 사람들이 나보고 싸고 맛있는 걸 찾아다닌다고 하지. 아니다. 나는 맛있는 걸 찾는 거다. 싼 것은 그냥 따라오는 거고. 비쌀 수도 있다. 하지만 맛있는 게 위주다. 살아보니 맛있는 게 대개 싸더라. 비싼 건 모양만 나지 맛과는 별로 관계가 없더라.”

나는 ‘신문사 안 개구리’


―기자 하면서 꼭 하고 싶었는데 못한 일이 있나.

“시경 캡(경찰 기자 팀장)과 법조 출입기자 못해본 것이 아쉽다. 법조 출입 못한 건 경찰 기자일 때 객기로 파출소에서 행패 부리고 붙들려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다.”

―50년 기자 생활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건 없나.

“다른 직업을 한 번도 못가져본 게 아쉽다. 세상에 태어나서 신문기자 외에는 한 게 없다. 내 친구들은 관리를 하기도 하고, 판·검사 하다가 변호사도 하는데 나는 언필칭 세상 일을 기록하는 직업을 가졌다면서 신문사 외에 다른 직장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문사 안 개구리’다.”

―신문사에서 맡은 일 중 뭐가 제일 재미있었나.

“사회부장이 재밌었지. 사회부엔 그날그날 승부가 있다. 그것도 정면 승부다. 방우영 회장 책 제목이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이다. 아침에 낙종했을까봐 겁나서.”

―앞으로 책을 쓸 계획은 없나.

“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될 수 있는 논점으로 기자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일단 쓰면 다 구문(舊聞)이다. 내가 초년병 총리실 기자일 때 그때 총리가 뭐라고 말했다고 쓴 걸 책으로 내면 누가 읽겠나. 다 자기 만족이지. 기자가 쓰는 건 ‘오늘’이다. 지금 생선을 회쳐 먹어야지,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내면 맛이 없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About THE BUPYEONG POST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