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명성원 앞 / 명성복지원

[박명식, 부평지역사 13] ‘캠프마켓 이야기’ (6) – 아메리칸 드림…APO 901 San Francisco California

부평의 현대사를 살펴 볼 수 있는 문화예술 작품에는 영화  ‘지옥화’ 1958년, 신상옥 감독 , 미국 소설  ‘Seasons in the Kingdom'( Norris), 시 ‘에스캄’ 1999(신현수), 소설 ‘깊고 긴 골짜기’ 1991(이원규), 소설  ‘Memories of My Ghost Brother’ 1996(하인즈 인수) 등이 있다.

애스컴시티에는 보급창(Depot)을 위시하여 공병대, 항공대, 의무보급창, 121후송병원, 보충대, 정비대, 통신대, 수송대, 보병부대, 소방서, 헌병대 등이 있었으며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각종 시설들과 장비들이 즐비했다. 일 년에 한 번 개방되는 날에는 부평 사람들에게는 그곳은 아메리칸 드림이며 신세계였다.

애스컴에는 각 부대의 군사시설과 함께 미군들의 생활을 위한 식당(messhall), 숙소, PX, 병원, 도서관, 극장, 체육관, 교회, 우체국, Hobby Shop 15개 이상의 영내 클럽(Officers Club, NCO Club, EM Club)등 편의시설들이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APO 901 San Francisco California의 거대한 도시가 형성 되었다.

애스컴시티에서는 나오는 풍부한 물자와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부평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부평 사람들이 되어 갔다.  낯선 영어 간판과 낮과 밤이 다르고 이곳 생활의 아픈 구석을 가려주고 치유될 것 같은 형형색색의 불빛, 달러가 가득한 이곳은 미군을 위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공간인 동시에 부평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며, 금단의 땅이었다.

외부에서 볼 때 부평은 척박한 자연 환경과의 끝없는 싸움, 여러 인종과 문화가 충돌하면서 혼란이 가득한 도시처럼 보였을 테고, 일제 조병창과 애스컴시티처럼 외부에서 오는 힘에 의해 격리된 공간으로 지난 81년간의 아픈 근현대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부평은 아픔을 포용하고 부평사람들은 이를 굴포(판개)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부평에는 외부에서 볼 때 ‘타자성(他者性)’ 있다고 하지만, 이는 고대 농경문화에 나오고 있는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또는 일부 가질 수 있는 지역 정체성으로 본다.

위에 영화와 소설에서도 기지촌 성매매와 암시장(양키시장), 생활사 등 부평 지역 이주민의 마을 신촌과 조병창 근로자들의 거주지였던 삼릉, 다다구미, 관동주, 백마장 등에서 1950~1970년대의 부평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부평 지역의 아픈 모습이지만 어려웠던 시절에는 생존의 공간, 삶의 터전으로서 양공주(비공식적 용어)골목, 달러골목, 양키골목으로 불릴 정도로 클럽과 기지촌 그리고 양키시장이 성업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산실 애스컴(ASCOM)은 지역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동시에 미국 대중문화를 소개하고 전파하며 한국대중 음악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배경지이다. 미군부대 영외에 있던 신촌과 삼릉 주변에만 18개 이상의 민간인 클럽뿐만 아니라 백마장과 부평 외곽 지역에도 다수의 클럽이 영업을 했다. 재즈, 블루스, 팝, 로큰롤에 댄스,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부평을 대중음악의 산실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였다.

2020. 5월에 철거된 드림보트 클럽 / 박명식

Lady birds 드러머 김삼순/박명식

부평 애스컴 영내 미군 클럽/부평역사박물관

TV가 보급되기 전에 AFKN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보급률이 타 지역 보다 높았고, 미군부대 영내에서 연주하는 밴드가 활성화 되어 있었다. 미8군 클럽에서 활동한 밴드는 용산에 있는 주한미공보원(USIS)에서 일 년에 서 너 번씩 오디션을 보고, 실력을 인정받은 플로어밴드와 특정 부대나 클럽 전속인 하우스밴드, 미군부대 내 정규 클럽이 아닌 뮤지션인 오픈밴드로 구분되었다.

1950년대 중반 전국의 미군 클럽의 수는 260여개였다. 밴드 파이오니아의 리더이며, 1960년대 에스컴 미군 클럽 밴드의 마스터 겸 운영자였던 차영수는 “악단이 연주하는 다운타운 클럽이 용산 보다 에스컴 시티가 많았고, 그중 컨트리 음악을 연주한 세븐클럽은 미군들이 유난히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다. (20세기 인천부평 대중음악 발췌)

부평 신촌 미군전용클럽 현황/부평역사박물관

수많은 클럽을 통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재즈, 팝, 맘보, 차차차, 블루 스, 컨트리, 소울, 스윙, 록큰롤, 부기우기 등 새롭고 다양한 서양 음악이 들어오면서, 신촌과 삼릉 일대에 많은 밴드 연주자들이 거주했으며, 배 호, 한명숙, 패티김, 윤복희, 장미화, 김상희, 최희준, 조용필, 트위스트 김, 박인수, 리마박, 최선미, 미스K, 데블스, 서수남, 김대환, 신중현 사 단, 키보이스의 김홍탁, 위대한 탄생의 김청산, 김씨스터즈, 이씨스터즈, 펄씨스터즈, 점블씨스터즈, 키즈밴드 탑 스텝스의 드러머 안기승, 혼성 키즈밴드 리틀 캐츠의 정현수, 스윙밴드 뉴컴과 록 앤 비트의 밴드마스터인 이관섭 등 미8군 무대의 인기스타들이 부평을 거쳐 간 음악인으로, 1950~70 년대 가요계를 이끈 수백 명의 뮤지션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부평이 소리로 기억하는 음악 도시로서의 모티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차차차 오남매는 1950~60년대 활동한 부평 출신의 5인조 어린이 가족밴 드로 아코디언, 드럼, 기타, 우쿨렐레, 하와이안 기타, 마스카라, 클라베 스 등의 악기연주와 재기 넘치는 보컬로 인해 인기가 높았다.

인천 최초의 걸그룹 레이디 버즈(Lady birds)의 드러머로 개인적으로 초등학 교 선배인 부평출신 김삼순, 그녀의 형부는 토미스 밴드마스터 김윤옥 이었다.

부평 신촌 송도홀에 부착된 허가 표지판 / 부평역사박물관

군표(U.S. military notes)는 본래 부대 내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로 외부에 유통 되는 것이 불법이었지만 기지촌에서는 군표가 흔히 사용되었다. 8번 게이트 위쪽에는 121병원과 PX와 클럽 등이 있었고 또한 아리랑택시가 운행되는 곳이기도 했다. 기지촌들은 미군의 물건들을 유통시키는 암시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부평의 양키시장을 중심으로 동인천의 양키시장, 서울 남대문시장 등지로 퍼져나갔다.

미군들의 물건 중에서 특히 의약품, 화장품, 미제 다리미, PX 판매용 라디오, 사진기, 의류, 문구류, 양주, 맥주, 양담배, 의류 등이 인기가 많았으며, 당시 미군 영외 클럽은 정부에서 ‘특수관광업’ 허가를 받은 외국인 전용 유흥음식점, 미용실, 세탁소, 양복점, 사진관, 기념품가게 등 미군을 위한 서비업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부평의 경제는 풍요로웠다. 여기에는 부평시장, 신촌시장, 백마시장이 형성되어 갔다.

양키시장에서 거래된 통조림으로 만든 고급 음식 부대찌개도 있었지만, 미군들의 잔반인 꿀꿀이죽(존슨탕⋅UN탕)은 저녁 길거리에서 사먹을 수 있는 살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담겨져 있다. 어쩌다 한 번 먹을 수 있던 초코렛, 껌, 콜라 등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다.

신촌에 있던 모자의원 / 부평역사박물관

6.25전쟁 후 극심한 경제난은 특히 여성들에게 가혹하였다. 대부분이 전쟁 미망인들 이었고 여성들은 가족 부양과 스스로의 생존, 인신매매 등의 이유로 부평의 기지촌으로 모였고, 외화벌이 일꾼과 성매매 여성이라는 이중적 시선 사이에서 미군을 상대로 달러를 벌었다.

이러한 위안시설이 “주둔군 당국의 요청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성병검진의 형식과 결과 역시 “외국 헌병대에도 연락”해야 할 사항이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설치와 운영, 성병관리에 비공식적이지만 미군이 깊숙이 개입했고, 당시 한국 정부에서도 ‘성매매 관리 정책’에서도 볼 수 있다.

2018년 2월 18일, 서울고등법원의 2심 판결에서 “국가의 기지촌 운영⋅관리 과정에서 기지촌 위안부였던 원고들을 상대로 성매매 정당화‧조장행위와 위법한 강제 격리수용행위가 있었다고 인정“ 오랫동안 침묵 당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고,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인권가치의 확인과 국가 책임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나영 교수 논고 발췌)

화랑농장에 있던 협성원 / 부평역사박물관

그리고 미군과 한국 여성의 만남으로 혼혈아가 탄생하였다.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한 혼혈아들은 부평의 여러 보육시설에 맡겨졌다. 이들은 아버지의 고국인 미국으로의 입양만이 편견과 멸시로 가득 찬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이들 입양인의 현황 파악과 정체성 회복에 대한 국가차원의 연구와 각 사회단체에서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부평 명성원 앞 / 명성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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