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탐사] 하길종, 그 모순과 분열의 순수(오늘 그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국영화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하길종과 그의 영화세계
 
“신은 미쳤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광기에 헐떡이고 있더니 신마저 미쳤다.”
하길종 감독의 절친한 벗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소설가 최인호는 그의 죽음 앞에 유례없이 격앙된 조사를 던졌다. 시인 정현종도 <시비를 거시는 하느님께>라는 시에서 “시비를 거시는 하느님, 구정물이나 한사발 들이키고 싶게 하는 은총을 심심찮게 내리시는 하느님…”이라며 ‘미남 H’의 승천에 분개했다.
하길종 감독은 79년 2월28일 38살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 작품 <병태와 영자>가 개봉한 직후였다. 그의 죽음이 당대의 문인들에게 던진 충격은 친우의 상실이 주는 슬픔을 훨씬 넘어섰다. 하길종은 만개를 눈앞에 두고 진 꽃이었다. 그의 작품도, 독설로 가득 찬 비평들도 모두 미완성이었지만, 당대의 식자들은 그에게서 대가의 출현을 예감하고 있었다. 10년에 걸친 상처투성이의 싸움에서 그는 누구도 이르지 못한 영화세상을 곧 펼쳐보일 것처럼 보였다. 그의 죽음은 어떤 전조도 없이 허망하게 찾아왔다. 최인호는 그래서 “세월이 가면 잊혀지고 퇴색된 쓰레기 같은 추억나부랭이”를 회고하는 대신 “천국으로 가지마라. 이승에서 혼으로 방황하라”고 독하게 썼다.
하길종, 야수파 행동주의자 혹은 타협을 저주한 예술가
올해로 20주기를 맞는 하길종 감독은 한국영화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7편의 영화와 두권의 유고집을 남겼을 뿐이지만, 가장 친한 동료들에게도 독설과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몽매한 반예술적 제작환경과 야수처럼 싸웠던 행동주의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타협을 저주한 예술가였다.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화 한가지가 친구인 인물평론가 이만재가 쓴 하길종론에 실려 있다. 큰 영화사의 중견간부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하길종은 여느 때처럼 주빈석을 도외시하고 또래의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실력자’는 그게 마음에 걸려 귀빈들에게 자신의 위력도 과시할 겸해서 하길종을 불렀다. 그러자 하길종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야 임마! 내가 기생이냐? 술을 권하려면 너희가 나한테 와야 될 것 아냐.”

 

(사진/하길종의 유고집 <백마 타고 온 또또> <영상, 인간구원의 메시지>)
그의 작품목록은 영화감독을 영화자본의 기생처럼 다루던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최인호의 말처럼 ‘그의 잠재된 능력을 보여주는 견본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해도 하길종의 작품들은 70년대의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작 대열에 올라 있다. <화분> <수절> <한네의 승천> 등 유럽예술영화풍의 작품들은 전통취향을 넘어 비판적 우화와 회화적 상징주의의 가능성을 펼쳐보였으며, <바보들의 전성시대> <병태와 영자> 같은 청춘물은 누구도 다루기 꺼리던 동시대 청년들의 호흡과 체열을 비늘처럼 생생하게 스크린에 되살렸다. 프랑스와 일본의 뉴웨이브가 모두 청년영화 혹은 성장영화를 장르적 토양으로 삼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의미심장한 징후였다. 그의 죽음으로 새물결의 도래는 결국 다음 연대의 과제로 넘겨지긴 했지만.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 “부딪혀 보는 거야”
하길종은 1941년 4월13일 부산 초량동에서 9남매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평탄치 않았다. 5살에 모친, 10살에 부친을 잃은 그는 친척집에 얹혀 살며 초량 중앙초등학교, 경남중학교를 다녔고 형을 따라 서울로 와 중동고를 다녔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카뮈에 탐닉했지만 비상한 머리 덕에 전교 3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의 하길종은 여러사람의 머리 속에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길종은 괴물로 통했다. 이만재씨는 그의 모습을 “늘 괴이한 형태의 작업복이나 구제품의상을 걸치고 다녔다. 그는 늘 중뿔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다녔으며 쉬르리얼리즘이란 단어를 말끝마다 인용하기를 즐겼으며, 열심히 난해시를 썼으며…”라고 묘사하고 있다. 고려대 불문과 김화영 교수는 2년 선배였던 하길종의 별명을 ‘부딪혀보는 거야’로 기억하고 있다. 하길종이 과대표를 맡았던 해 여름방학에 불문학과생들이 제주도 성산포의 한 마을로 15일 계획의 농촌계몽활동을 간 적이 있었다. 물론 “그냥 부딪혀보는 거야”라는 과대표의 노선대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려간 것이었다. 후배들은 길도 닦고 도랑도 치며 땀흘리고 있는데, 하길종을 비롯한 선배들은 술로 밤낮을 지샜다. 4, 5일쯤 지난 어느 날 숙소인 초등학교 교실로 돌아왔더니 칠판에 하길종의 필체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부딪혀본 결과, 공금이 다 떨어졌으니 각자 알아서 서울로 돌아갈 것.” 김 교수는 “그때는 무책임한 선배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은 정말 그냥 부딪히며 일생을 살았고, 70년대 청년문화의 한 상징이 됐다”고 회고했다.
대학3학년 때 등록금을 털어 <태를 위한 과거분사>라는 자비시집을 낸 것도 유명한 일화. 자신이 신봉해 마지않던 쉬르리얼리즘과 다다이즘의 기분으로 마구 써내려간 듯한 그의 시들은 해독불능의 암호처럼 보인다. “형상은 무덤을 찾고 무덤은 인어의 가슴에 묘비를 세우는 시간…”, “가슴엔 死의 서리를 꽂고 지옥보다 더 살기 좋은 정원이 있어…” 하는 식의 자의식과잉과 위악적 제스처가 거의 전편을 채우고 있다. 시집의 끝부분에는 검붉은 태양의 반원을 중앙에 그려넣고 “태양의 거실에는 먼지가 많오. 털어주러 가시려오”라는 이상 투의 어구를 동서남북으로 배치한 ‘새헌법 공청회 관람후기’라는 기막힌 시까지 있다.
퇴폐에서 불온으로, 유희에서 혁명으로
(사진/자비를 들여 출판한 시집 <태를 위한 과거분사>) 퇴폐적 낭만주의와 유희적 모더니즘 사이를 오갔던 그의 의식에 줄기가 잡히기 시작한 것은 역시 4·19였다. 데모대의 맨앞에 나선 사진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학생운동에 열성적이었던 하길종은 이상주의자가 됐다가 5·16을 거치며 좌절과 불신에 빠져든다. 한 에세이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의 젊음은 4월과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4월은 돌아올 줄 몰랐다. 4월은 젊음과 함께 자취를 감춰버렸고 나는 오랫동안 변색된 젊음 속에서 그대로 늙어갔다.”

 

졸업 직후 신필림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영화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계기는 그다지 명확하진 않다. 그의 글을 놓고 짐작하면, 그가 대학시절에도 졸업 뒤에도 무료한 시간을 극장에서 달래며 영화와 친해졌고, 미국 유학시절중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출현을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신필림을 나와 에어프랑스에 입사했던 그는 프랑스를 거쳐 6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길종이 미국에 머물렀던 1964년부터 70년까지는 사회·문화적으로는 급진적 자유주의와 히피의 물결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고, 영화계도 그 영향으로 유럽 예술영화적 교양을 수혈받은 요나스 메카스 등의 진지한 작가들이 젊은 영화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던 때였다. UCLA에는 70년대 미국 예술영화의 최전선이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하길종보다 1년 먼저 와서 그를 맞고 있었다. 고국에서 상실한 4월의 흔적을 60년대 미국 청년문화와 새로운 영화조류에서 찾으려 했던 셈이다. 뒤에 하길종은 오해되고 있는 미국 히피에 대해 “평화와 사회개혁을 원하는 새 세대의 공통적인 젊은이”라는 요지의 매우 공감어린 에세이를 썼고 그 공감은 한국의 청년을 그린 <바보들의 행진>에도 깊이 스며 있다.
유학시절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영향을 미친 사람이 시인 김지하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같이 다녔던 김지하는 60년대 후반 마산요양소에 머물면서 유학간 동창생과 2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때 김지하가 구상한 시나리오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였다. 동학을 소재로 한 이 시나리오 구상은 김지하의 해박하고 열정적인 미학적·이념적 신념을 담아 바다를 건넜다. 훗날 하길종은 구속된 김지하를 그리며 <자유를 잃은 시인의 여름>을 슬퍼하는 에세이를 썼다. 유학중에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을 만나 결혼했고 7년의 유학생활 끝에 영화이론(MA), 영화연출(MFA)로 두개의 학위를 땄다. 재학시절에 만든 단편 <병사의 제전>으로 미국의 메이저영화사 MGM이 미국 전역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학도 4명에게 수여하는 메이어그랜드상을 받았다. 학교쪽에서 강사를 맡아달라는 제안도 거절하고 하길종은 70년 가을 서울 땅을 다시 밟는다. 본격적인 영화인생의 시작이었다.
충무로와 타협한 수재, “난 이제 딴따라야”
하길종은 당시 충무로에서 구경할 수 없었던 수재요 엘리트였다. 게다가 어떤 미남배우 못지 않은 수려한 용모까지 지녔다. 친구였던 인물평론가 이만재는 하길종을 “이 나라 영화계에서 가장 총명한 머리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지식이 예술을 구원할 순 없겠지만 ‘한국영화는 저질’이라는 통설이 당연시됐던 연대에 그의 지적 배경은 굉장한 무기처럼 보였다. 하나의 칼도 희귀하던 시절에 영화의 본토에서 날을 간 이론과 연출의 두칼을 옆에 찬 초유의 인물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건 누구에게도 없던 무기였고 많은 동시대인들을 긴장시켰지만 정작 하길종 자신에겐 독이기도 했다.
두개의 칼로 그는 창작과 비평 양쪽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창작활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기성질서와 부르주아 사회의 벽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그린’(안병섭) 데뷔작 <화분>과 한사군시대의 비극적 부부를 통해 폭군의 압제를 드러낸 <수절>은 흥행에서 참패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은 두 영화를 검열이 난도질한 것이다. 특히 <수절>은 20분이나 잘려나갔다. 하길종은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내 모습을 공개하는 것 같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화분>은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재래의 한국영화와 전혀 다른 참신한 시도와 수법을 동원했으며 파졸리니 감독의 <테오라마>를 연상케 하는 충격을 주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한국 영화현실에 절망했다. 한동안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르고 조금은 대중에게로 다가가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가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대학생들의 경쾌한 풍속도 속에 청춘의 상실감과 비애를 효과적으로 녹여넣은 이 영화 역시 30분 분량이나 잘려나가는 참변을 겪었지만 서울관객 20만을 모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비평계의 찬사도 쏟아졌다. 히피정신을 당당히 유포하는 비평의 명성까지 가세해 하길종은 단숨에 70년대 청년문화의 대변자가 됐다. 하길종은 최인호의 인기소설을 영화화하는 타협을 받아들이면서도 원작에는 없는 우울한 청년 영철의 캐릭터를 삽입하고 영화의 가벼운 톤에 우울한 정조를 깔아놓음으로써 당대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하길종은 대중소설의 영화화라는 당시 충무로의 추세에 끌려가기 시작한다.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7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여자를 찾습니다> <속 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 중에서 <여자를…>을 제외하곤 모두 흥행에서 성공했지만 분명히 <바보들의 행진>에서의 후퇴라는 게 명백했다. 하길종 역시 이 점을 의식한 듯 “난 이제 딴따라야”라며 자조를 일삼았다. 다만 외화수입을 위한 우수작 선정을 겨냥하고 제작자가 나선 <한네의 승천>만은 초기의 두작품에 비해 훨씬 매끄러워진 구성과 짤 짜인 화면구도, 상징의 적절한 배치로 그의 잠재력을 확인시켰다.
유고집의 발언으로 미루어보면 하길종은 스스로도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비판을 시도한 <화분>과 <수절> 그리고 <한네의 승천>에 깊은 애착이 있었다. 검열로 누더기가 된 <수절>은 차치하고라도 <화분>을 사석에서 걸작이라고 부를 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70년대의 한국영화를 개관하는 평론에서는 <한네의 승천>을 <문> <이어도> <화려한 외출> 등과 함께 수준작이라고 스스로 평했다. 하지만, 훼손된 작품만으로 판단하는 무리를 무릅쓴다면, 하길종이 스스로 영화도 아니라고 말한 후기의 상업영화도 당대의 대중영화보다는 앞선 점이 있었다.
<속 별들의 고향>은 전편의 캐릭터와 구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멜로드라마지만, 화면의 섬세한 구성과 색감은 90년대 영화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이며, 특히 말라버린 모래사장과 병실의 시트를 이어붙이는 대목의 이미지 연결은 일품이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동경과 꿈의 거처이던 바다가 이제 죽음의 이미지로 싸여 있다. 감독의 자조와 비애는 이렇게 깊어져 있다. <병태와 영자>는 <졸업>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느슨한 코믹멜로이지만, 은근한 슬픔이 한구석에 스며 있으며 병태가 영자를 쟁취하기 위해 서울의 후미진 공간을 질주하는 마지막 5분간의 장면에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돌파하는 기이한 힘이 있다. 하길종은 극장 한켠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상실한 4월을 떠올리며 울었다고 한다.
창작과 비평, 양날의 칼을 세우다
창작활동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행인지 불행인지 불분명하지만) 그의 비평적 언사는 끝까지 매서움을 잃지 않았다. 하길종은 영화를 만들면서 다른 영화들에 대해, 심지어 자기영화까지도 도마에 올려놓고 비평활동을 지속한 희귀한 인물이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 비평활동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영화를 만든 뒤로는 다시 활자 비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길종은 초기의 프랑수아 트뤼포만큼 독한 비평을 <뿌리깊은 나무> <세대> <영상시대> 등의 지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내놓았다.
하길종은 대학영화과의 강사를 거쳐 서울예대 교수로 자리잡았던 데다 당시엔 영화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격을 시비걸진 못했지만, 냉혹한 비판의 대상이 된 충무로 감독들이 이 유학파 인텔리를 좋게 보았을 리 없다. 유고집에선 빠졌지만 하길종으로부터 “이건 영화가 아니다”라는 독설을 들었던 김아무개 감독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김 감독은 <병태와 영자>를 편집하고 있는 하길종을 끌고나가 “너 죽인다”며 주먹다짐을 벌였다. 늘 이런 식이다 보니 비평이 발표된 뒤 으레 얼마 동안 그의 얼굴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유현목과 김기영의 작품 외에 그에게 유보없는 찬사를 들었던 영화는 없었다. 그의 공격은 이장호, 김호선, 김승옥 등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작품도 비켜가지 않았다. <별들의 고향>은 ‘작가의식이 결핍’돼 있으며 ‘지리멸렬’하고 ‘진부’한 대목이 눈에 띄는 영화이며, <겨울여자>는 김승옥이 쓴 시나리오의 부실함 때문에 실망스런 영화가 됐다. 하길종의 비평에선 심지어 최인호조차도 한국영화를 미학적으로도 오도한 책임에서 완전히 면제되진 않았다.
배타적 영화예술론자의 비극적 최후
하길종은 배타적인 예술영화론자였다. <록키>의 주인공을 본받을 만한 주인공으로 청소년들에게 설파하고 <셰인>에서 미국영화의 정점을 읽는 순진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영화창작은 경건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종교적 참배”라는 잉그마르 베리만의 말을 주문처럼 비평의 곳곳에 심어놓았다. 또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잉그마르 베리만, 장 뤽 고다르, 샤트야지트 레이 같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데 정력을 쏟았으며 “장사꾼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영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 한국영화의 불황과 저질의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영화가 상품임을 부인했다. 충무로의 현실에 부딪혔을 때 그는 이렇게 자조했다. “아직은 영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다. 있으려면 가만히 있거나 말 잘듣는 개가 되면 시대를 살아가는 현명함일 것이다.”
비평적 엄격함은 그러나 그를 마모시켰다. 자신의 예술론에 부합하는 영화 만들기가 검열과 상업적 요구 때문에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자위하면서도 그는 술과 자학에 빠졌다. 그의 제자이며 마지막 두 작품에서 연출부로 일했던 영화평론가 박평식씨는 “영화 찍은 기억은 별로 없고 술 마신 기억만 있다”고 말했다. 하길종은 자신의 대표작 <바보들의 행진>이 대중소설의 인기에 기댄 기획이며 <속 별들의 고향>과 <병태와 영자>는 더 큰 타협의 산물임을 비평문에서 인정했지만, 사석에선 자신의 영화에 대한 비판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매번 벌컥 화를 냈다.
그가 가장 즐겨쓴 말은 ‘피고’와 ‘다 그런 거 아니가서’라는 평안도 사투리다. 지적 엄격함이 타협에 안주하고 사는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을 피고로 직시하게 했고, 그 출구의 부재가 ‘다 그런 거 아니가서’의 자조를 낳았다. 이장호, 김호선, 홍파, 이원세 등과 함께 “우리는 ‘영화 부재’의 책임을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선언문으로 75년 7월 출범한 ‘영상시대’ 동인 활동도 그에겐 큰 힘이 되지 못했다. 모든 동인들이 70년대 후반에 주도적 상업영화 감독으로 변신해간 탓이다.
그가 필생의 작품으로 삼았던 것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였다. 변인식의 회고에 따르면, 하길종은 자신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주지 않는 기색이 보이면 곧 제작에 들어갈 리스트로 윤흥길의 <장마> 등과 함께 이 작품을 거론했다 한다. 비평적 이상과 작품의 현실이 극단적으로 분열됐을 때, 그래서 소용돌이치듯 비약의 불꽃이 막 점화됐을 시점에, 하길종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이상주의자의 피를 수혈했던 4·19 이래 최대 사건이었던 10·26 직전이었으므로 그의 죽음은 더욱 허망했다.
허문영 기자(씨네21. 하길종 2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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