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부평을 읽어주는 남자 57] 중봉 조헌, 고양골/율도2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부평도호부(부평군)에는 조선 중기 문신ㆍ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ㆍ의병장으로 중봉(重峰) 조헌(趙憲)에 관한 2가지 이야기 전해 오고 있다.

지금의 계산1동 경인교육대학교 정문 앞 일대를 고양골, 고양꿀 또는 지래골이라 불러왔다. 이렇게 불러 온 것도 선조 10년(1577) 이후 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아늑한 골짜기에 산림이 우거져 인가와는 동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1. 고양골이라 부르게 된 것은 성균관을 위시하여 전국 360개 지방 향교에 배향한 한국 유현 18위 중의 한 분이신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峰) 조헌 (趙憲…1544년 김포 출생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인) 선생이 이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서부터 귀향굴(귀양살이한 골짜기로 ‘고양굴’로 변음)로 부르게 된 땅 이름이다.

2. 인천 서구에 있는 밤섬[栗島]은 원래 무인도였는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조25년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라고 전하고 있다. 중봉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청주 옥천에서 승전하고 금산 싸움에서 700의사와 아들 완기(完基)와 더불어 순절한 문열공이다.

귀양살이한 조헌은 부평의 지리를 잘 알게 되었으며, 학식과 덕망이 두터워 가는 곳마다 존경을 받아왔다. 귀양에서 풀려 공조좌랑으로 출사할 때 한양에 다녀오는 길에 낯선 김총각을 데리고 와서 자기 집에 두고 글도 가르치고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얼마 후 김총각을 이웃집 처녀와 결혼을 시켜 자기 자부처럼 데리고 살았다.

조헌은 토함 이지함과 함께 임진왜란이 멀지 않아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피난지를 밤섬[栗島]으로 정하고 김총각을 장사치로 가장시켜 미리 보내어 바다를 막아 논과 밭을 만들고 집을 짓되 벽에는 찹쌀을 찧어 발라 혹여 집에 양식이 떨어져도 벽에 붙은 떡을 떼어 끓어기만 하면 끼니가 될 수 있게 해 놓았다.

조헌의 예언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집안의 가솔과 김총각의 처가집 가족들을 미리 개척해 둔 밤섬으로 피신케 하고 자신은 의병장으로 의승장 영규대사ㆍ 700의병들과 금산전투에서 순국한다. 나라에서는 문열공의 시호를 내리고 후에 문묘에 배향하고 생장지 김포 감정리 우저서원(牛渚書院)에 봉안한다.

율도는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고 1884년 포리항 (浦里港)을 축조. 길이가 700발에 이르렀다. 1886년4월24일 정부의 전조창 (轉糟倉)을 건축하여 안아지고개를 통해 한강으로 세곡(稅穀)을 육송(陸送)한다.

이때 부평 부사 정병하에게 토포사(討捕使)란 직책을 내려 곡물을 호송케 하였다.

그래서 한 때는 인천항의 내항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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