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식, 부평지역사 5] ‘열우물 이야기’ Ⅰ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십정동(十井洞)은 조선시대 말에는 인천군 주안면 십정리(仁川郡 朱雁面 十井里)지역으로 열 개가 넘는 우물이 있다고 하여 ‘열우물마을’(十井)이라 하였다.

또 일설에는 현 상정초등학교가 있는 위쪽에 큰 대동우물이 있어 물량이 많고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스하여 열(熱)이 나는 우물이 있어 열(熱)우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구전되는 이야기로 함봉산은 한남정맥 줄기로 임꺽정이 다니던 길 이었다고 한다.

계양산⋅원적산의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다 십정동에서 동쪽으로 확 꺽이기 때문에 십정(十丁)이란 명칭이 붙여졌고, 후에 십정(十井)으로 오기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전통시대부터 십정동에는 전통의 자염(煮鹽)단지가 있어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으며, 아랫열우물 마을은 1907년에 근대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 생산지인 천일제염시험장이 들어선 상징적 공간으로 1911년에는 99정보의 천일염전 지역이었다. 십정동에는 염전의 인부들이 모여 살다가 1965년 수출공단과 인천기계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공단근로자들로 붐비기 시작하였다.

초기 만석동⋅율도와 도화⋅용현동의 철거민촌 및 신덕촌⋅부흥촌⋅해방촌으로 불린 달동네는 1960년대 후반부터 도시개발로 인하여 밀려난 철거민이 터를 잡은 공간으로,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하여 20여 년간 재개발에 대한 요구가 있어 왔으나 번번이 좌절되다가, 최근 ‘십정2구역 주거환경개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사업이 진행되며 달동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고, 이제 이곳에는 새로운 주민들이 새로운 마을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될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인천부에 속한 지역으로 부평부와 경계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법성산을 지나 남동구 간석동과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함봉산이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서구 가좌동과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만월산이 위치한다.

옛 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서는 ‘정항(井項 : 우물목)’과 ‘정항현(井項峴 : 우물목고개)’ 등 십정동과 관련된 지명이 확인된다. 정항현은 전통시대에 부평부와 인천부를 경계 짓는 동시에 연결하는 주요 도로(大路-큰길)로 추정되며 유사시 왕실의 안전을 보장하는 도로 중 하나였다.

그 길은 ‘영종로(永宗路)’라 하여 영종진(永宗鎭)이 위치한 영종도(永宗島)로 가는 길이었다. 영종진의 역 할은 유사시 왕실의 강화 피난로가 차단 되었을 때 월미행궁을 거쳐 강화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국가와 지방 단위에서 상당히 중요시 여긴 교통로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조선시대 인천부 朱雁面에 ‘십정리’라는 지명으로 속했던 해당 지역은 일제강점기 부천부에 속했다가 다시 인천부로 환원되는 등 행정구역의 변천을 겪었다. 그러다가 1968년 인천시 북구 십정동으로 편제되며 지금까지 부평구의 관할에 있다.

1980년도까지도 신촌초등학교 사거리에서 인천상정고등학교까지의 경원대로가 없어 화랑농장의 구르지고개(서산고개)와 부평 아트센터 뒷길 낭떠러지의 위험한 공동묘지 길(작은 원통고개)로 다녔으며, 좀 멀리 돌아서 십정2동 동암역이나 동암초등학교 앞에 있는 원통고개를 넘어 다녔다.

구르지고개 (열우물에서 화랑농장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 “굴르다”에서 유래)

십정1동(윗말⋅상십정⋅웃마을 등)은 행정상 하나의 마을이지만 마을마다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지닌다. 윗열우물마을(양짓말〈십정동 62번지 일대〉⋅음짓말〈십정동 22번지와 144번지 일대〉⋅구석말〈십정동 42번지 일대〉⋅잿말〈십정동 94-1번지 일대〉)은 십정동의 원마을로 조선시대 여러 성씨(成氏⋅具氏⋅辛氏⋅朴氏)들이 집단 거주하는 집성촌이었다.

선대를 이어 후손들이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되어 옛 농촌 풍경을 보이고 있다. 아랫열우물마을(넘말⋅행길새⋅삼새미⋅아래말 등)은 근대 주안염전의 개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한 마을이다. 염전이 사라진 자리에 수출공단이 들어서며 유입된 근로자들로 인하여 마을이 번영하였다.

달동네는 1960년대 후반부터 도시개발의 논리로 모여든 철거민들이 형성한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마을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개선해 나갔다. 낡은 집에 그려넣은 벽화로 인하여 ‘열우물벽화마을’이라고 하는 별칭을 얻었다. 자주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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