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뱃갑 메모
용인의 김현경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 생전의 시인 김수영이 썼다는 메모장들을 보았다. 1966년에 쓰인 산문「생활의 극복―담뱃갑의 메모」에서 김수영은 수첩을 지니고 다니기가 귀찮아 담뱃갑에 메모를 해두는 버릇이 있음을 밝힌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수가 많으니 제반사에 너무 밀착하지 말라’,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주목 거리는 내용이 아니라 메모를 적어둔 담뱃갑 자체에 있다. 김수영은 이 메모란 것이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진리’도 아니지만, 그것이 다름 아닌 옹색하기 짝이 없는 담뱃갑에 적힐 때 “나대로의 이행(履行)의 전후관계에서 보면 한없이 신선하고 발랄하고 힘의 원천이 된다”면서, 그 순간 자신은 “딴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자못 벅차오르는 어조로 고백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딴사람―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김수영의 담뱃갑에 가장 많이 적혀 있던 메모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음을 잊지 말자. “잡지사의 원고료의 액수와 날짜, 사야 할 책 이름, 아이들의 학비 낼 날짜와 액수, 전화번호, 약 이름과 약방 이름, 외상 술값……” 그의 말대로 이런 자질구레한 숫자와 암호 속에 우리들의 생활의 전부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탄 외상장부
오래 전 취재 삼아 간 산동네에서 연탄가게를 하는 부녀를 만났다. 혼례도 미룬 채 부친의 일을 거들던 그 집의 여식은 내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6학년 때는 한 책상을 쓰던 짝이었는데 나는 그날에야 비로소 용의검사 때마다 손톱에 낀 때로 담임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말순이는 방과 후면 아이들 틈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오르기 위해 끙끙대는 아버지의 고단한 연탄 수레를 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차가 들어가지 않는 산동네의 독거노인들을 차마 떠날 수 없다는 그들의 외상장부를 보았다. 1970년대부터 써온 외상 노트는 어떤 역사책도 따를 수 없는 그 마을의 실감나는 역사였다. 그 어느 페이지엔 겨울을 나기 위해 창고 가득 연탄을 채운 날의 뿌듯함과 창고가 비어갈수록 바람에 덜컹거리는 지붕마저 심란해오던 가계의 불안감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을 것 같았다. 미시사도 이런 미시사가 있을까. 거창한 고담준론 보다 생활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춘추와 사기임을 안다. 말순이의 손에서 지워지지 않던 연탄재를 먹으로 삼아 먹감무늬 같은 글을 써보자 하였던 게 서른 해 전 일이다. 화성문화원 60년사 회의에 갔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파초 일기
노작마을의 파초는 뿌리가 해남 대흥사 절 마당까지 간다. 다산 정약용이나 초의선사의 차담을 엿들었을 법한 파초다. 제주 유배 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의 방문 지켜보았을 게다. 역사를 간직한 파초가 지리산 박남준 선생의 뜰에서 한 시절을 보내다가 대전의 눈 밝은 농부를 만나더니 마침내 화성의 동탄까지 옮겨왔다. 옛 선비들은 빗소리를 듣기 위해 파초를 심기도 하였다. 호박잎과 수련잎 그리고 토란잎에 내리는 빗소리를 좋아하는 나로선 거부하기 힘든 것이 그 너른 잎을 실로폰처럼 두드리고 가는 구름이다. 토종 수선화와 튤립, 철철이 바뀌는 꽃들로 꽃단추라도 채워주듯 함부로 버려져 있던 공유지를 곱게 여미어놓은 이는 노작마을의 염기동 선생. 한 해 전에 부탁한 걸 잊지 않고 캐어온 구근을 문학관 앞에 심었더니 두어 달 사이 어른 허리까지 올라온 줄기가 제법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제 비가 오면 김동명의 시「파초」라도 낭독해보리라. 문학관의 시민 낭독 동아리 <돌모루> 회원들과 함께 할 수도 있으리라. 서류 더미 사이에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지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으나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직원들 말로는 암행을 나온 공원과에서 생태 교란종이니 속히 뽑아내라는 지시를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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