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식, 부평지역사 3] “수도사거리”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수도길사거리는 부평시장의 시발지였다.

부평대로에서 부평중⋅고등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인 한서빌딩과 여산빌딩 사이에(부평동 439번지 일대)상수도의 수압을 높여주는 가압펌프장 이 하나 있었다. 이곳을 수도사거리라 불렀다.

대한제국 광무10년(1906) 6월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을 신설하고 인천개항으로 모든 선박과 조계지 그리고 인천 인구증가에 따른 식수난을 해결하고자 한국 최초로 노량진에서 인천 간에 1906년 11월에 경인간수도 기공식을 갖고 4년 만인 1910년 10월 30일 통수식을 가졌다.

노량진 한강변에 수원지를 만들고 여기서 500㎜ 주철관을 부평을 거쳐 인천 수도국산(송림동 배수지)까지 매설했는데, 부평지역은 부천시 약대동에서 산곡 4동 ‘장고개’까지 일직선으로 수도관을 묻었고 그 지상에 수도선 관리용으로 폭 4m 정도의 도로를 설치하여서 이를 ‘수도길’이라 불러왔다.

 

지금은 없어진 수도길이 부평가압 펌프장(부평동초등학교 뒤편) 앞 부평대로에서 옛 김포국도와 교차되어 십자로를 이루어 ‘수도사거리’라 하였다. 이 곳에 마을이 생기니 수도사거리는 마을이름의 고유명사가 되어 불리어 왔다. 교통이 편리한 길거리에는 장사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 사니 이 곳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수도길이 생기기 전에는 동네로서는 동수재이(하촌마을-현 부평5동 주민센터 인근) 뿐이고 동수재이 정거장(부평역)은 무지공처(無地空處)에 조그만 부평역사(驛舍)가 외로이 있을 뿐이었다.

 

1934년 부평에 전기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평역전과 이 수도사거리에 점포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이 곳이 인천부에 편입되던 1940년대에는 각 20여 호의 점포가 형성되었으나, 부평역전은 아⋅태전쟁을 위한 1934년 강제적 토지구획정리방식인 조선시가지계획의 실시로 ‘앞산’(현 대한극장 인근)을 헐어다 길을 내고 정지 작업을 하는 등 조병창 공사와 같이 상업⋅공업 및 주거지역이 지정되는 지역으로 새로운 도로와 건축물이 생겨 어수선한 상황이 되니 모든 장사꾼들이 수도사거리로 모여 점포가 늘기 시작하였다.

대양사(大洋社百貨店), 양복점, 미곡상, 마차공장, 자전거포, 약방, 빙과점, 주점, 중국집 등에다 십 여 개의 노점 비단가게를 곁들여 마치 시골장터와 같은 풍경을 이루어서 인가도 부평역전을 능가 한 30여 호의 큰 마을이 되고 이어서 「신트리」마을이 생기니 부평의 상가형성의 발상지라 할 수 있다.

사진 상단 부분의 도로가 현재의 부평대로이며 도로 우측 하얀 건물이 수도가압 펌프장이다. (수돗물을 장고개를 넘어 송림동 수도국산까지 모터 펌프 압력을 이용하여 보냈다) 자주 군부대 급수시설차량이 이용.<설명: 박명식 향토사학자>

 

당시 새로 생긴 인천부 부평출장소(조병창 확장공사의 하청업체인 다마보구미(玉槽組)의 현장사무소)가 계산동에서 백마정 입구의 지금의 대림아파트 자리(3동과 5동 인근)로 이전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래는 모두 이 수도사거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때 일본인과 부유한 한국인은 부평역전으로 몰려들고 서민층 한국인은 모두 수도사거리로 몰려와 매일 장터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때의 대중교통이 없는 시절이라 원행은 경인철도를 이용하고, 일반인은 자전거로, 그나마 없는 사람은 보행으로 왕래하였다.

이 상수도는 70년대 까지도 사용하더니 인천 발전에 따른 상수도 확장공사가 대형화되고 부터 모두 폐쇄되어 없어지고 지금은 부평대로와 일부 구간만 흔적으로 남아있다.

노량진 – 약대동 – 고니샛말 – 신트리(수도사거리) – 병참 – 장끝말(장고개) – 번지기나루터(인천교) – 송림동 으로 연결되는 길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을 한 연합군은 9월17일 새벽에 원통고개 전투(부평전투)로 인민군을 격파하고 김포비행장 방면(미 해병1사단 5연대)과 서울 방면 경인로(미 해병1사단 1연대)로 나뉘어 진격을 하는데, 이 수도길은 김포비행장으로 가는 진격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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