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공원(홍중공장-88정비대)와 캠프마켓 (부평역사박물관 제공)

[박명식, 부평지역사 8] ‘캠프마켓 이야기’ (1)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2020년 현재, 부평에 위치한 미군부대의 공식 명칭은 캠프마켓(Camp Mark et)이다.

용산 미군기지(Yongsan Garrison)에 속한 미 육군의 군수기지(logist ics depot)이다. 반환공여구역 및 전체 면적은 약 60.6만m² 이다. 현재 3개의 구역(편의 공간, 창고 공간, DRMO)으로 구분되어 있고, 애스컴시티(Ascom City)가 해체되는 1973년을 기준으로 볼 때 현 캠프마켓(아래 사진 A-1구역)은 약 1/2로 축소되어 현재 남아 있다.

광복 후,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상륙한 미군 제24군단 군수지원사령부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인천일본육군조병창 시설을 그대로 활용한 점을 고려하면, 애스컴 시티(Ascom City) 구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인천일본육군조병창의 면적은 약 100만평으로 조성하였고, 미군이 조병창과 주변의 적산 공장에 주둔하며 기지를 확장한 점을 볼 때, 조병창의 면적 보다는 훨씬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애스컴시티와 현 캠프마켓을 비교하면 약 1/10이 축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스컴시티 배치도(출처: 김현석)

애스컴 데뽀 (ASCOM Depot) 또는 8057부대나 55부대라고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애스컴 사령부는 메인구역은 캠프마켓으로 그 전에는 ‘쿼터마스터 시티(Quartermaster City)’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애스컴 시티(ASCOM City)의 군사우편 주소는 APO 901이었다.  APO는 Army Post Office(군사 우체국)의 약자다.  미군은 1963년 애스컴시티를 미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 7개의 캠프로 구분하여, (A와 A-1) 캠프 마켓, (B) 캠프 헤이즈, (C) 캠프 그란트, (D) 캠프 타일러, (E) 캠프 아담스, (F)캠프 해리슨과 캠프 테일러, (G) 728 헌병중대(미군 형무소)가 있었다.

부평공원(홍중공장-88정비대)와 캠프마켓 (부평역사박물관 제공)

1938년 총동원체제를 선포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대륙병참기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1939년 일본 육군은 부평에 약 100만평을 목표로 조병창을 건설하였다. 뒤이어 1940년에는 ‘경인시가지계획’ 발표하여, 경인지역에서 7개의 공단과 11개의 거주지를 건설하고, 영등포-부평-인천지역을 공업지대로 연결하고자 하였다.

부평지역에 처음 미군이 진주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9월 이다. 미군은 일본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을 끝낸 후, 얄타 회담에 의거하여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38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군이 들어오고, 이남은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1945년 9월 8일 상륙했다.

미 제24군단 지휘부가 먼저 들어왔고, 미 제7사단이 뒤를 이었다. 초기에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부대들은 대개 야전부대 중심이었으나 차츰 군정부대가 투입되어 군정을 이끌어 갔고, 결국 1946년 1월 4일 주한미군정사령부(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USAMGIK)가 출범했다.

1945년 이후 미군이 부평에서 완전히 철수한 시기가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26일 미군은 탈출 매뉴얼에 따라 코드명 ‘하이볼(Highball )’을 발령한 후 애스컴시티를 떠났다. 이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다시 부평에 자리를 잡았고, 미 제3군수사령부(3d logistical command)가 다시 부평에 주둔을 한 때가 9월 18일이니, 애스컴 시티는 그 사이 약 3개월 동안 북한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1.4후퇴로 다시 철수해야하기도 했지만, 이후 지금까지 75년 동안 규모는 축소됐어도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의 산실 에스컴(ASCOM)은 지역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동시에 미국 대중문화를 소개하고 전파하며 한국대중 음악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배경지였다. 에스컴(ASCOM) 영내에는 12개의 미군 클럽이 있었고, 영외 주변에 23개 민간인 클럽이 영업을 했다. 재즈, 블루스, 팝, 로큰롤에 댄스,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로 발전된 음악은 부평을 대중음악의 뿌리로 자리 잡았을 수 있게 하였다.

미8군 클럽에서 활동한 밴드는 용산에 있는 주한미공보원(USIS)에서 오디션을 보고, 실력을 인정받은 플로어밴드와 특정 부대나 클럽 전속인 하우스밴드, 미군부대 내 정규 클럽이 아닌 뮤지션인 오픈밴드로 구분되었다.

수많은 클럽을 통해 재즈, 팝 등 다양한 서양 음악이 들어오면서, 신촌과 삼릉 일대에 많은 밴드 연주자들이 거주, 1950~70년대 가요계를 이끈 뮤지션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부평이 음악도시로서의 모티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2009년 5월 23일 ‘근린공원’으로 최초 고시되었으나, 2017년 7월 12일 ‘문화공원’으로 변경하였다. 캠프마켓 지구단위계획이 2009년 5월 결정 후 10년이 경과하여 여건 변화에 따른 타당성과 시민 여론 등을 반영한 계획 변경의 필요성에 의하여 개발방향의 설정 및 재원조달방안을 위하여 2021년 9월까지 부평미군부대 지구단위계획결정(변경) 고시한다.

또한 주민들의 참여공간인 인포센터를 통한 ‘공원의 명칭 부여’와 문화 공원으로 ‘활용방안’등을 강구할 때라 본다. 그리고 아픈 근현대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써 ‘캠프마켓 아카이브(Archive)’가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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