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네임 Norb-Faye가 1948년 함봉산에서 촬영한 열우물 마을과 주안염전

[박명식, 부평지역사 6] ‘열우물 이야기’ 2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십정동(十井洞)에는 17,404가구에 37,455명이(2019. 12. 현재) 거주하고 있다. 십정2구역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끝나는 2022년 3월이 되면 5,678세대 입주할 예정이다. 6.25 이후 십정동은 이주민, 철거민들의 마을이었던 산동네는 포용력 있게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주안면(朱岸面)은 인천부로부터 10리 떨어져 있다. 238호(戶)로, 남정(男丁) 450구(口), 여정(女丁) 616구가 있다. 부평부와의 경계다.”라고 하였다.(岸⋅鴈 → 雁의 오기로 보인다. 여기서 人丁이라함은 公役의 부과를 위한 15세 이상의 남녀를 일컫는 말이다.

“주안면(朱鴈面)은 관아로부터 동쪽으로 10리 떨 어져 있다. 상십정리(上十井里), 하십정리(下十井 里), 석촌리(石村里), 간촌리(間村里), 성리(城里), 구월리(九月里), 지상리(池上里), 전자리(前子里) 가 있다”  『인천부읍지』(1842년경) 방리(方里)

부평은 雄府로서 고려시대부터 1914년까지 부평도호부의 범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상십정리(십정1동)는 하봉산(荷峯山)과 원통산(圓通山)의 위치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하봉산은 현재 함봉산인데 그 위치를 상십정리후록(上十井里後麓)이라 하여 상십정리의 뒷산기슭이고, 원통산은 현재 만월산인데 그 위치를 상십정리동미(上十井里東尾)라 하여 상십정리의 동쪽 꼬리라 하였다.

하십정리(십정2동)는 봉황산(鳳凰山), 선래천(仙來川)의 위치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봉황산은 서낭당이 있는 신성한 산이라서 붙은 이름인데, 산에 큰 나무가 하나 서 있어서 ‘한가지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봉황산은 상십정리와 하십정리에 걸쳐 있었는데, 그 사이 고개를 ‘한가지고개’라고 했다. 한가지고개가 지금의 열우물로이고, 산의 일부가 깎여 십정공원이 만들어졌다. 선래천은 서해로부터 하십정리 쪽으로 자연 발생한 갯골에 배가 드나들어서 생긴 선래천(船來川)이 변형된 것이다. 선래천은 지금의 십정시장 인근에 있었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111호에 의거 이때 상십정리와 하십정리 신설된 부천군에 편입 되었는데, 다소면(多所面)과 주안면(朱雁面)을 합쳐 만든 다주면(多朱面) 소속이었다.

당시는 1907년 현재 부평구 십정동 558번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인 주안염전이 계속해서 규모를 확장해 나가는 시기였다. 이후 염전면적을 1-8구 (212정보)까지 확대하였다. 이후 1920년대 남동염전과 군자염전, 1930년대 소래염전이 조성되어 인천에서 많은 소금이 생산되기에 이른다. 염전은 저수지, 증발지, 결정지 등 3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금은 채취 후 창고로 보내지는데, 주안염전의 경우는 주안역 앞의 창고로 보내서 포장 후 반출하였다. 소금은 주로 철도와 배를 통해 조선 전역으로 판매되었다.

당시 소금은 공업, 농업, 어업, 염장, 된장, 조미료 등으로 사용하였다. 소금생산이 끝나가는 10월에 염전제(鹽田祭)를 열어 염부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10월 5일 주안염전을 시작으로 6일에는 남동염전, 8일에는 군자염전에서 거행하였는데, 그 행사는 전야제, 신사(용화선원사 자리)참배, 시상식, 체육대회, 영화회 등이 있었다. 아랫열우물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십정포(十井浦)라고 하는 갯골이 발달한 곳이었다. 하십정리 쪽에는 염전 전매국관사가 있었고, 염전 인부들이 모여 살았다.

닉네임 Norb-Faye가 1948년 함봉산에서 촬영한 열우물 마을과 주안염전

1940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40호(1940년 3월 28일)에 의하여 문학면, 남동면, 부내면, 서곶면이 인천부에 편입되며 인천부의 부역이 다시 한 번 확장되었다. 이때 십정리도 인천부 확장 대상 지역에 포함됨과 동시에 일본식 지명인 대도정(大島町)으로 개칭되었다. – 18번 버스의 추억을 돌아보다 –

1980년대 초 경원대로가 생기기 전에 부평여상 입구(윤영슈퍼 앞)가 유일한 대중교통으로 18번 버스의 시발역이자 종점이므로 학생들과 주안 5⋅6공단 노동자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어릴적 60~70년대 열우물 구석말에서 농사짓던 기억을 더듬어 가면 인근의 토지는 붉은 황토로 농업과 염전이 있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였으며, 포도밭⋅논⋅솔밭이 있던 ‘북망산’이라 불리던 이 일대에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그 입구가 (구)시장이었다.

십정2동에는 한때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한센병자들이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며 고단한 삶을 영위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곳이 천주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주축된 십정농장이다. 성계원이 있던 만월북로에 부평농장과 장수산 인근의 청천농장이 있었다. 인천 대부분의 달걀은 그들 손에서 공급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운영은 잘되었다.

열우물경기장 옆에는 인천도축장이 1983년 개설되었으며, 인천축산물백화점을 비롯해 골목골목 형성된 상회 등 현재 100여 곳의 고기 판매점이 도소매업을 하고 있다. 예전의 서곶 가좌동 장고개길로 가는 여우재로 입구에는 유명한 이화식당이 90년대 중후반까지 영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1959년 개통된 인천교(현재 송림로 인천교삼거리에서 방축로까지의 구간)가 생기기 전에 배다리⋅싸리재⋅송림로타리로 가는데 이용하였던 아래⋅웃번지기(番作里)나루터와 심씨고택이 나온다.

1960년대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었던 경인공업지대인 5⋅6수출공단과 인천기계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주안갯골인 인천교와 열우물 인근은 점차 매립되어 1998년에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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