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과 부평 (2019년) -박명식 제공

[박명식, 부평지역사 12] ‘캠프마켓 이야기’ (5) – Ascom City, 부평 주민들에게 많은 일자리 제공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애스컴시티 내 한국인 노무자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3,600여명 이상 수준으로 미군부대 기능직부터 사무직이 여러 직종 에서 근무했으며, 대부분이 전국외기노동조합에 속해 있었다.

(미장공, 벽돌공, 목공, 전기배선, 운전사, 용접공, 배관공, 컴퓨터 정비공, 통신기사, 제도사, 비서, 타자수, 서기, 은행출납원, 경비원, 회계원, 보급서기, 컴퓨터프로그래머, 간호원, 의사 등) 신문 및 잡지의 기사를 보면 1966년 당시 부평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한 국인 노동자수를 5,000명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노무단(KSC) 배지 (Korean Service Corps badg) -부평문화원 제공
외기노조 부평지부 조합원 수의 년도별 변화(부평문화원 제공)

주한미군 부대 한국인 노동자 단체로는 한국노무단(KSC)가 있다. 한국노무단은 6.25 전쟁 중 1950년 7월 26일 미8군 워커중장의 요청에 의해 창설되어 전선에서 주로 탄약, 연료, 군 자재, 식량, 식수 등 보급품을 운반했고, 진지공사, 전⋅부상자 후송, 부대막사, 도로와 교량의 보수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최초에는 민간인 수송단 또 운송단(영어: Civilian Transportation Corps (CTC))으로 불리었으며, 국가 긴급 동원령에 따라 노무자로 징집된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다. 국제 연합군은 노무자들이 짊어지는 지게가 영어 알파벳 “A”와 닮은꼴이라 하여 그들을 “A Frame Army로 불렀다.

주한미군 소속의 한국인 노동자는 4주 단위로 월급을 받아 1년에 총13번의 급여가 나왔다. 또한 다른 직업에 비해 급여수준이 높아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미군부대 노무자 급여:39,840~49,280환/월, 일반 제조업체 근로자 급여:26,000~28,400환/월 – 쌀 한가마니 가격: 14,000~19,000환)

1950년대 말 미국원조가 줄어들며 국내경기가 침체되자 그나마 민간수요를 채우기 위한 공업제품이나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가동률이 떨어졌다. 그 결과 부평지역 주민 중 제조업체 종사자는 전후 복구사업이 시작된 1953년 무렵에는 6%(1,130명)에서 1957년 말에는 1%(110명)에 지나지 않게 된다.

캠프마켓 근무 한국인 노무자의 신분증-부평문화원 제공
512중장비 중대에 근무했던 카투사(신촌초교 자리)-부평문화원 제공

1953년 부평출장소(부평구⋅계양구) 인구 30,367명, 1961년1.월29일자 신문기사에 7만 명, 1962년 12월말에는 대략 8만7천 명 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Ascom City가 부평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고, 1960년대 중반 부평4공단이 생길 때까지 일자리를 대신했다.

부평 미군부대 애스컴 주변 주민 중 미군부대 일자리와 연관이 있는 서비스업이나 기타 업종에 종사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았으며, 부평4공단이 형성되기 전까지 절반이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1953년도에 미군부대 이외 농업종사자는 전체 약 20%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많은 직종이 상업인데, 1957년 말에는 7%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타 지역보다 실업률이 낮았으며, 주민들의 생활도 타 도심지역에 비해 나았으리라 짐작된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원조삭감과 한국경제의 전반적이고 지속적인 침체로 인하여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다.

한국수출산업4공단(부평문화원 제공)
한국수출산업4공단(부평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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