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 대배우 이순재 별세

최광석 기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 씨가 25일 새벽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향년 91세. 지난해 말부터 건강이상설이 들려왔고 최근까지 복귀를 다짐하며 재활을 하던 중 병세가 악화됐다. 고인의 별세 소식에 연극계와 연예계에서는 슬픔에 잠긴 추모가 이어졌다.

2023년 연극 ‘장수상회’에서 고인과 노년의 사랑을 함께 연기했던 원로배우 박정자는 “연기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없는 분이셨다”며 “어떤 역이든, 어떤 상황이든 당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불사르신 분이시다. 다 이루셨다고 생각한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2022년 고인이 연출한 연극 ‘갈매기’에 출연했던 배우 주호성은 “노년에 후배들 밥도 많이 사주시고 베푸셨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며 고인을 회상했다. 이어 “연기에 대해서도 많이 말씀해주셨다. 지도도 많이 해주시고, 우리한테는 큰 별이 진 것”이라고 애통한 마음을 전했다.

여행 예능 ‘꽃보다 할배’를 연출한 나영석 PD도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선생님 몸이 안 좋으셔서 뵙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소식이 들려와 당황했다”며 “가장 많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끝까지 무대 위에 있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실 수 있기를 기도하겠다”고 전했다.

고인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네 살 때 한학자였던 조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서울고 재학시절 6·25전쟁을 겪었다. 1954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후 우연히 로렌스 올리비에가 열연한 영화 ‘햄릿’을 접했다. 예술인을 속칭 ‘딴따라’로 낮잡아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하고만 싶었다.

극작가 김의경 등과 함께 전쟁 통에 해체된 ‘서울대 연극회’를 다시 꾸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연기를 향한 일념으로 당시 한국 현대연극의 중심이었던 극단 ‘신협(新協)’을 찾아갔다. 이해랑 선생을 비롯해 극작가 유치진, 연출가 이진순 등 기라성 같은 스승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1960년 서울대·연세대·고려대 극회 출신을 중심으로 ‘실험극장’을 창단했다. 창단 멤버는 김의경, 허규, 김성옥, 김동훈, 이낙훈, 오현경, 여운계 등이었다. 이른바 ‘소극장 운동’의 시작이었다. 고인과 동지들은 연극을 학문 삼아 공부하고, 일생의 업으로 택했다.

연기를 사랑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연극무대에 선 이래 처음으로 ‘출연료’를 받은 게 1978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때였다. 정말 배가 고팠다. ‘생계’를 위해 방송 연기를 시작했다. 1964년 TBC 개국 공채 1기 탤런트로 입사했다. TV 드라마는 연극무대와는 사뭇 달랐다.

고인은 한국 방송사(史)와 함께 성장한 ‘살아있는 역사이자 전설’이었다. 헤아리기도 벅찬 작품들에 주·조연으로 출연하며 안방극장을 풍미했다. 칠순에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구순에도 연극 무대에 오르는 등 나이가 무색한 연기 열정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지난해 방송된 KBS2 ‘개소리’를 통해 생애 첫 연기대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한 번 깊은 울림을 전했다. 그는 명불허전의 존재감을 보여줬고, “연기는 연기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결기 서린 수상 소감으로 시상식장을 가득 메운 동료·후배연기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짧게 정치에도 몸담았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서울 중랑 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연기자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문화·외교 분야 의정 활동에 주력했다. 1998년 중랑문화원 초대 원장으로 취임, 문화 복지에 힘쓰는 등 각종 사회복지 봉사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 활동을 잠정 중단한 이후 3개월 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많은 이들의 걱정과 응원을 동시에 받았다. 그리고 10개월이 채 되지 않아 전해진 별세 소식. 긴 세월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함께 써온 대배우가 영면에 들면서, 대중과 후배들의 깊은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고,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평생 연기에 대한 끈을 쉬이 놓지 않았던 고인은 이미 ‘이순재’라는 장르이자 브랜드였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해 70년 가까이 TV와 영화, 연극무대를 종으로 횡으로 누빈 예인이자 장인이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해로한 아내 최희정 씨와 아들과 딸이 상주로 이름을 올렸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 운구는 생전 고인이 가르쳤던 학생들이 맡기로 했다. 이천 에덴낙원에서 마침내 영면에 든다.

About THE BUPYEONG WEEKLY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