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식, 부평지역사 10] ‘캠프마켓 이야기’ (3)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우리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닌 주어진 해방일 때 감당해야 할 허망함이라는 것을 우린 현대사에서 잘 보아 왔고, 부평은 그 12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왔다. 길게 이어진 높은 담벼락 너머는 늘 궁금했고, 금단의 땅이 있었던 캠프마켓은 이젠 시민의 품으로 2020년 10월 14일에 일부 반환된다.

외부 세력 및 특정 집단에 의해 형성된 캠프마켓은 뼈아픈 민족 분단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명확히 이해하고 기억해야할 역사적인 장소이다.

조선말까지 현 캠프마켓의 부지와 주변 땅은 민태호의 소유였다. 자식이 없던 민태호는 자신의 조카이며 고종의 조카인 민영환을 입양했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우국지사 민영환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에 의해 체결되자,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보내고 자결한다.

이때 민영환의 땅은 우여곡절을 거쳐 송병준의 소유가 된다. 민영환의 식객으로 있던 송병준은 헤이그 밀사사건 후 고종황제 양위운동을 벌이고 일제에 국권을 넘기자는 등 친일매국 행위를 한 정미칠적(丁未七賊)의 한 명이다.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은 일진회를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의병토벌에 가담케 한다.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 외에도, 부정한 공작금, 뇌물⋅횡령⋅강탈로 재산을 모은 송병준은 지금의 캠프마켓과 주변 토지 430만평을 민영환의 가족들로부터 강탈하였다. 민영환의 가족과의 소송은 100여년을 넘게 이어오게 된다.

17대 국회에서 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2005. 12.29.)에 의거 대법원에서는 송병준의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부평미군기지 내 토지 소유권 소송에서 2011년 5월 13일 대법원에서 ’친일재산은 국가소유가 정당하다‘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캠프마켓 땅을 놓고 진행된 친일파 후손의 조상 땅 찾기 소송이 종결된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국가 소유가 된 이 땅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공업화를 추진, 경인공업지대로 형성되었다. 부평지역에는 일본의 미쓰비시를 비롯한 고주파중공업⋅자동차공업⋅요업⋅철사⋅기계제작⋅제강 주식회사 등 대규모 공장들이 이곳에 들어선다.

Ascom City 전경(1948. 10. 9.) 사진제공 : Norb-Faye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반도의 식민지화와 1931년 만주침략으로 대륙진출을 도모함에 따라 물류비용 절감을 위하여 군수공업의 병참기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부평지역에 일본육군조병창을 1939년부터 100만평을 목표로 조성하여, 1941년 5월 5일 개창식을 가졌다. 일제가 도발한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일본군은 소총, 총검, 탄환, 포탄, 군도, 차량, 주정, 무전기, 잠수정 등을 생산 조달하였다.

1920년 12월부터 시작된 조선산미증식계획(朝鮮産米增殖計劃)의 핵심은 토지개량사업이고, 그것은 곧 미곡생산을 위한 관개(灌漑) 개선에 집중되었다. 또한 수리시설로 혜택을 볼 일본인과 일부 조선인 지주들 중심으로 수리조합을 조직한다. 결과적으로 일제의 정책에 의해 조선농민에게 수세, 고율소작료, 조합비, 비료부담 등이 가중되어 농촌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여 사회적 분업의 발전에 기초한 본래적인 상업적 농업의 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농민계층이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소작인들의 저항과 만주나 북간도로 이주 또는 해외로 이민을 가게 된다.

1909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 및 1930년대 들어와 격렬해지는 농민조합의 투쟁과 부평지역의 공업화가 농촌 노동력을 얼마만큼 흡수하여 농촌사회의 지주소작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봐야 할 부분 중 하나다.

이러한 노동력을 흡수를 위해 1930년대 초중반 우가끼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 주도의 ‘조선공업화’ 정책 진행과 더불어 1937년 ‘인천시가지계획’을 발표하고, 1938년 국가총동원체제를 선포한다. 뒤이어 1940년에는 ‘경인시가지계획’을 발표하여, 경인지역에서 7개의 공단과 11개의 거주지를 건설하고, 영등포-부평-인천을 공업지대로 연결하고자 하였다.

조병창의 공사는 일본 건설업체인 다마보구미(玉操組), 다다구미(多田組), 간또구미(關東組), 하자마구미(狹間組), 시미즈구미(淸水組) 5개 업체가 맡았다. 이 공사를 위해 김포, 강화뿐만 아니라 조선의 전 지역에서 근로보국대를 동원하였다. 조병창에는 일본군 헌병대와 육군 1개 연대가 상주하여 수비를 담당하면서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왜 일제는 부평지역에 조병창을 건설 했을까?
1. 인천항과 철로를 이용한 물류교통이 편리
2. 경인지역의 인력동원이 용이
3. 한강 배후지로 식량 조달과 물이용이 쉽고
4. 부평지역은 분지형으로 안개로 인한 공습이 어렵고 방어와 통제가 쉽다.

태평양전쟁에 패하게 된 일제의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항에 1945년 9월 8일상륙한 미24군수지원단은 부평조병창 자리를 그대로 접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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