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푸마토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표정을 은은하면서도 어둡게 처리해서 여인의 표정을 쉽게 알 수 없게 했다.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다. 이 기법은 유화 물감으로 얇게 수십 회씩 칠을 퇴적시켜 평면에 입체감을 갖게 한다. ‘연기처럼 사라지다, 안개 낀’의 뜻으로서 다빈치가 활동한 밀라노의 안개가 자주 끼는 지형적 특성이 선물한 기법이다. 안개의 불투명성은 명약관화의 너머에 있는 신비 쪽으로 지각을 열어놓는다. 누가 왜 에스엔에스를 하지 않느냐 핀잔을 주기에 ‘스푸마토’ 기법이 잠시 떠올랐다.
코끼리의 상아
자연 상태에선 상아가 있는 코끼리의 생존 가능성이 더 높다. 물을 찾아 땅을 굴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싸움의 날카로운 무기로서 영역을 지키는 데 최적의 전투력을 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잠비크 내전 기간에 식량과 판매용으로 무분별하게 밀렵이 이루어지면서 상아가 있는 코끼리가 대량 학살되었다. 코끼리들은 결국 상아를 포기했다. 2018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따르면 살아남은 코끼리의 절반 넘게 상아가 없었다. 또한 전쟁 후에 태어난 암컷 코끼리 중엔 30% 이상이다. 아프리카코끼리는 지금 상아가 없는 동물로 형질 변화 중이다. 사는 동안 나에겐 어떤 상아가 사라진 걸까. 각자 물어볼 일이다.
정치인과 시(詩)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피격당한 날 밤 로버트 케네디는 인디애나주 흑인사회에 비보를 전하는 난감한 일을 맡았다. 여러 지역에서 이미 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케네디는 연단에 올라 한 편의 시를 낭독했다. “우리의 잠속에서, 망각할 수 없는 고통이/ 가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지네/ 우리의 절망 속으로,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고귀한 신의 은총을 통해 지혜가 다가올 때까지”. 아이스킬로스의 시구였다. 그날 밤 시는 슬픔이 절망을 거쳐 신의 지혜를 꿈꾸는 기도 속에 폭동을 잠재웠다. 정치인들이 가끔 시를 읽는 경우를 본다. 내겐 화성 출신의 정치인 고 김근태가 낭독한 신동엽의「껍데기는 가라」가 기억에 생생하다. 얼마 전 경남 고성문학회에 갔다가 박인환의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목마와 숙녀」를 암송하는 분을 만났다. 알고 보니 고성군 군수였다. 청중들의 반응은 그 자체로 뜨거웠다.
시여
“정조대왕 을묘년(1795) 가을이었다. 매사 이기상(이옥)이 귀양살이의 엄명을 받아 호서의 정산현으로 편관되었다가, 9월에 영남의 삼가현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듬해 봄, 별시에 응하여 수석을 하였으나 임금의 명령으로 방의 끝에 붙여졌다. 5월에 기상이 부친상을 당하고, 기미년(1799) 겨울에 다시 삼가로 갔다가 경신년 봄에 비로소 풀려 돌아왔다. 지금 그 남겨진 글 가운데 <봉성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가 유배되었을 때 토속과 고적을 기록한 약간의 항목들이다. 문장이 자못 아름답고 깔끔하여 사랑스럽다. 이에 베껴서 <봉성문여>라고 이름 지었다. 옛사람들이 사(詞)를 지어서 시여(詩餘)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시 같으면서도 시가 아니기 때문이지만 기실 시의 나머지이다.” 이옥의 <봉성문여>에 붙인 김려의 발 중 ‘시여’라는 용어가 예사롭지 않다. 시 같으면서도 시가 아니지만 실은 시가 다 담지 못한 나머지 혹은 여백, 잔여로서의 시에 대한 논의는 당대의 시론을 훌쩍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급제를 한 선비를 유배 보낸 정조의 문체반정은 참으로 해괴하기 짝이 없다. 시인의 관점에선 정조 또한 마키아벨리즘의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끝)
부평위클리 THE BUPYEONG WEEK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