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천(블루스기타리스트)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11월이 되었고, 늘 그랬듯 대학 입시철이 돌아왔다.
프랑스의 교육제도에는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이라는 특별한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소수 정예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하며, 마치 한국의 ‘특목고+SKY대학+행정고시 합격자 양성원’을 합쳐 놓은 듯한 성격을 가진다.
입학 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 프레파(Classe Préparatoire, CPGE)라는 2년간의 고강도 준비 과정을 거친 뒤 경쟁시험을 치른다. 한 학년 정원은 수십에서 수백 명 수준으로 소규모이며, 주로 공학(École Polytechnique), 경영(HEC Paris), 정치·행정(Sciences Po, ENA) 분야를 전공한다.
졸업생 인맥이 막강해 프랑스 정·관·재계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을 거쳐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면 곧바로 고위 공무원으로 등용되는 경우가 많다. 즉, 그랑제콜에 입학한다는 것은 곧 프랑스 상류층에 진입할 기회를 얻는 것과 같다.
물론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여러 문제점도 야기한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불평등, 교육체계의 이원화, 폐쇄적 인맥 구조 등이 있다. 입학 경쟁이 극심하여 중상류층 자녀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노동자·이민자 가정 출신이나 저소득층 학생이 입학하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또한 그랑제콜과 일반 국립대 사이의 위상도 격차가 커서 ‘엘리트 vs 일반인’ 구도가 고착화된다. 더 큰 문제는 졸업생 네트워크(Old Boys Club)가 채용이나 승진에 영향을 미쳐 외부인의 진입 장벽을 높이고,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랑제콜은 프랑스 엘리트 양성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과 교육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정치인으로는 현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전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등이 있다. 여기에 전 총리 에두아르 필리프, 알랭 쥐페(Alain Juppé), 로랑 파비위스(Laurent Fabius), 엘리자베트 보른(Élisabeth Borne) 등도 모두 그랑제콜 출신이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는 ENA가 통치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프랑스 정계 최상층은 사실상 그랑제콜 동문회와도 같다.
한때 서울대학교 폐지론이 등장한 적이 있다. 이는 단순히 “대학 하나 없애자”는 주장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와 교육 불평등 문제와 깊이 연관된 논쟁이다. 서울대 졸업장은 공직·대기업·전문직 채용에서 지나치게 유리하며, 권력·부·인맥 등 사회적 자원도 서울대 출신에게 집중된다.
서울대 합격자는 수도권·특목고·강남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해, 지방·저소득층 학생은 진입 장벽이 높다. 또한 국가 최고 교육 자원을 서울에만 집중하는 것은 지역 불균형을 심화시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서울대 폐지론은 ‘대한민국 학벌주의의 상징을 해체할 것인가’와 ‘국가 경쟁력의 상징을 지킬 것인가’라는 가치 충돌로 이어진다.
현실적으로는 폐지보다는 권한 분산과 네트워크화가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는 입시 구조 개혁, 국립대 네트워크화, 졸업장 효과 완화, 지방대학 지원강화, 사회 인식 변화 유도 등이 필요할 듯싶다.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단순히 서울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입시 구조 개혁, 국립대 네트워크화, 그리고 학벌 영향 축소를 동시에 추진해야 효과가 있을 터다.
2022년 프랑스의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의 한 축이었던 ENA가 폐지되고, INSP(Institut National du Service Public, 국립공공서비스원)으로 대체되었다. 한국에서도 엘리트 교육, 입시경쟁, 학벌 중심 사회 같은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데, ENA 폐지 사례는 제도적 특권구조에 대한 하나의 대응책으로 볼 수 있다.
핵심을 짚자면 단순히 엘리트 양성기관 폐지가 아니라, 어떤 교육 기회와 입학 기회가 누구에게 열려 있는가,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실제로 다양한 배경의 인재가 진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등교육 구조나 엘리트 코스(예: 특목고, 영재학교 등) 재검토, 더 많은 배경의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 확대 등이 유사한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부평위클리 THE BUPYEONG WEEK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