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비
‘자비(慈悲)’에서 ‘자(慈)’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사랑스러운 눈을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떴다. 그리고 ‘비(悲)’는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마른 젖을 물리며 피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왔다. 젖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젖을 물리는 것이 사랑이다.
언어는 도구만은 아니다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의 삽화(揷話)는 산뜻한 명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브르통이 뉴욕의 공원에서 떠돌이 맹인 거지를 만났다. 거지는 ‘나는 맹인입니다’라고 쓴 팻말을 목에 걸고 구걸 중이었다. 행인들은 무심히 그냥 스쳐 갈 뿐, 그 누구도 그를 돕지 않았다. 딱하게 여긴 브르통이 맹인의 목에 걸려있던 문구를 바꾸어 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맹인 앞에 있던 깡통은 동전과 지폐로 순식간에 가득 차게 되었다. 돈뿐만 아니라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당시는 대공황 시기였다. 자신을 지키는 데도 급급해서 누군가를 보살필 여유를 갖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을 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맹인은 어리둥절해서 팻말의 문구를 행인들에게 읽어달라고 청했다. ‘나는 맹인입니다’는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봄이 머지않았는데 나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일상어의 표현이 정보만 제공하는 도구 역할에 머물고 있는 데 비해 시인의 새로운 문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서적인 맥락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사막의 발자국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파리 지하철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에서 8천 편의 응모작 중 장원을 한 오르텅스 블루(Hortense Vlou)라는 여인의 시 ‘사막’이다. 혼자 길을 걸을 때 너무 외롭고 무서워서 나도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배는 앵무새를 키우고 있는데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 또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했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은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그린 뒤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친구로 삼는다. 자신의 발자국과 대화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단독자
“단독자를 대중으로 바꾸는 것이 타락이다.”라는 말이 있다. ‘대중’은 저마다의 차이를 동일성의 논리에 굴복케 한다. 단독자의 언어를 추상화하지 않고 경청하는 데서 윤리는 발생한다. “그대는 대양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방울이 아니다. 그대는 하나의 물방울로 이루어진 대양이다.”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의 시구다.
거룩해지기
교도관으로 정년퇴직한 뒤 십년 동안 폐지를 주워 1억 원을 모아 기부를 한 분의 이야기다. 그는 눈썹이 없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왜 그런지 묻자 폐지 주우러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마을에도 들어가는데 거기 갈 때 눈썹이 있고 머리카락이 있으면 그곳의 환자들에게 미안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이성복 시인의 대담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시라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자세에 있을 때 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라는 것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카프카도 그랬다. “어떤 것을 대할 때 거칠게 대하면 천박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초대받은 손님처럼 대하면 그것은 귀한 것이 되고 동시에 우리 또한 귀한 사람이 된다.” 나로선 까마득한 일이다. 버려도 될 목도리를 애써 찾으러 가는 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끝)
부평위클리 THE BUPYEONG WEEK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