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언의 ‘시간을 달리는 공간'(8)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같이한 팔미도 등대

*편집자 주: 인천포스트와 인천시립박물관의 협력에 따라서 인천시립박물관 소식지 <박물관 풍경>의 ‘시간을 달리는 공간'(김시언 시인) 글에 한하여 인천포스트에 게재합니다.

글쓴이: 김시언 시인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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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 등대는 대한민국 1호 등대다. 팔미도는 바닷길을 시속 16㎞로 50분가량 달리면 도착한다.  인천에서 15.7㎞, 무의도에서 900m 떨어져 있다.  ‘팔미도’라는이름은 큰팔미도, 작은팔미도 두 섬이 ‘여덟 팔(八)’자처럼 어우러져 붙여졌다.  주민은 살지 않는다.

등대가 없을 때 밤바닷길은 칠흑처럼 어두웠을 것이다. 불이나 소리를 써서 길을 알려주는 일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기를 쓰게 되면서 비로소 등대가 등장했다.

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 1일에 처음 불을 밝힌 이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묵묵히 같이 했다.  1880년원산항이 개방되면서 인천, 부산항도 개항하라는 외세의 압력을 받았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근대식 등대가없어서 우리나라를 넘보는 열강의 배가 암초 등에 부딪혔다. 더욱이 인천은 한양과 가까워 열강의 배가 자주 드나들었고, 사고도 많았다.  일본은 조선에 근대식 등대를 지으라고 요구했고, 이에 조선은 1902년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5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고는1903년 6월에 일본 제국주의에 불빛을 열어주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전날인 1950년 9월 14일 오후 7시.  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최규봉 미 극동사령부 켈로부대(KLO) 부대장에게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라고 명령했다.  15일 새벽 1시 45분 드디어 등대의 불이 켜졌다.  ‘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지자  15일 오전 6시 206척의 함정에 타고 있던 한· 미 해병대 등 7만여 명의 군인이 월미도 상륙에 성공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교착 상태에 있던 6·25전쟁의 승기(勝氣)는 대한민국이 잡았다.

올해로 꼭 113년이 되는 2016년 6월 1일, 팔미도 등대를 보러 출발했다.  처음 세워진 등대는 등명기가 낡아 불빛이 약해져 등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2003년 새로운 등대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2006년에는 등대 문화유산으로 선정돼 2009년부터 일반인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 두 개가 위 아래로 나란히 서 있다.  팔미도 유람선은 하루에 세 차례씩 운행하지만 예약한 사람이 스무 명이 돼야  뜬다.  미리 확인하고 출발해야 허탕치지 않는다.

선착장을 밀어내면서 출발한 유람선은 시속 15킬로미터 정도로 달렸다.  영종도, 송도신도시들이 모두 희뿌연 안개와 공해 속에 빌딩이 간간이 보였다.  날이 맑았다면 영종대교도 보이고,  시화 방조제가 보였을 것이다.  인천대교 아래를 지날 때는 너도나도 유람선전망대로 올라가 대교가 나오게 인증샷을 찍느라 바빴다.

팔미도 둘레길은 소나무와 소사나무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나무가 많았다.  짠내 나는 바람을 맞으며 큰나무와 넝쿨식물이 서로 몸을 빌려주면서 기대어 있었다.  둘레길을 돌고서 등대를 흘낏 쳐다보았다.  10초에 한 번씩 백색 불빛이 반짝이고, 맑은 날은 50㎞까지 불빛을 비춘다는 팔미도 등대.  한 세시 넘게 그 자리에서 눈 끔뻑거리며 밤바닷길을 일러주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박물관 풍경]  2016. 여름.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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